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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뜰살뜰 구구샘 Jan 16. 2024

어르신, 왜 저한테 소리 지르세요?

김상운, <리듬>

나는 아파트 동대표다. 매달 입주자 대표 회의에 참석한다. 한두 달에 한 번은 꼭 일반 입주민께서 참관해 주신다. 자애로운 회장님께서는 참관인께 발언시간을 많이 부여하신다. 그럼 80%의 확률로 고함이 내 귀에 배송된다.


민원인은 대부분 고함을 치신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연세는 기본 60~70대로 보인다. 아들 뻘인 동대표들에게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나신 걸까? 화 내시는 이유도 다양하다.


-왜 지하주차장에 환풍기 켰냐! 전기요금 아깝다!

-우리 집에 차 3대인데, 내가 내 집에 차를 왜 못 대냐! 주차 자리 확보하라

-우리 동쪽 조명은 더 밝게 해 주고, 다른 동의 조명은 전기요금 아까우니 꺼라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다.


그러므로 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걸 왜 '고함'을 지르면서 하냐고. 심하면 회장님 멱살을 잡으려고도 하고, 책상까지 내리치기도 한다.(실제로 회의 테이블 다리가 부서졌는데, 아직도 안 고쳐주고 있다.)


동대표 중에 내가 가장 어리다. 다른 분들은 꾸역꾸역 참더라. 하지만 나는 다르다. 80년대 후반에 태어났으므로 흔히 말하는 mz라고 해도 되겠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도저히 못 참고 대응을 해봤다.



[대응 ver.1]

어르신: 내 차가 3대인데! 내가 내 집에 차를 못 대냐!

나: 저는 집에 1대뿐인데, 저도 늦게 오면 차 못 대요. 그럼 저는 어떡하죠?

어르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젊은 놈이 따박따박!

나: 저 대의민주주의 투표로 정당하게 선출된 대표인데요. 나이는 상관없는데요.

어르신: ㅐㅂ;ㅑㅓㄹ;ㅁ나얾!!!

나: (같이 소리 지름)


이 책, <리듬>과 정확히 반대 전략을 사용했다. 결과는 파멸이었다. 어르신과 나는 리듬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lose-lose 게임을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테마는 '옳고 그름'이 없다. 모두 나름대로 '맞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답이 없다.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다. 이제 스텝 2로 넘어가자.



[대응 ver.2]

어르신(다른 사람임): 환풍기 어쩌고 저쩌고! 전기요금 어쩌고 저쩌고!

나: 지금 소리 지르고 계십니다. 알고 계신가요?

어르신: (더 큰 목소리로) 내가 무슨 소리를 질렀다고 그래!!! 어린놈의 자식이 말이야!!!

나: 저희도 고함 못 질러서 참고 있는 거 아닙니다. 목소리 낮춰 주세요. 10초 세겠습니다. 그때까지 안 낮추시면 저도 소리 지릅니다.

어르신: 뭐라고? 이 녀석이!!!

나: 10, 9, 8... 2, 1. (으아악!!!)


물론 이 결과도 파멸이었다. 그분들은 본인이 고함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시더라. 인정할 생각도 없으셨고. 이번 작전도 실패였다. 그분들에게 리듬을 맞춰드리지 못했다. 다음엔 또 바꿔봐야지.



[대응 ver.3]

어르신(역시 또 다른 사람): 우리 쪽 조명은 더 밝게 해 주세요! 밤에 잘 보이게요! 그런데 다른 동쪽 조명은 왜 이렇게 밝아요? 거긴 필요 없지 않아요? 전기 요금 아까운데 좀 꺼주세요!

나: 아이고.. 조명 때문에 많이 불편하셨겠네요ㅠㅠ

어르신: 요새 관리비가 얼마나 올랐는지 압니까?! 동대표들이 잘 관리해야 할 것 아닙니까!

나: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부족했습니다. 전기요금 많이 나와서 속상하셨죠? 저희도 전기료 절감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르신: (아까보단 낮은 목소리로)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온 김에 몇 마디만 더 하고 갈게요. 요즘 사람들이 말이야..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안 해요. 공동체 생활...(이하 30분 정도 더 훈화 말씀하신 뒤, 흡족하게 웃으며 귀가하심)


효과는 강력했다! 리듬을 맞췄더니 문제가 해결되었다. 물론 중간에 '논리'라는 방망이를 크게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얼굴 붉혀서 뭐 하겠는가? 다 잘 된 일이다.




이 책, <리듬>에선 이렇게 정리한다.


상대가 다짜고짜 화를 낼 때, 내가 화로 맞서면?

=> 화가 증폭된다.


상대가 화를 내도, 내가 차분함으로 대응하면?

=> 상대도 점점 차분해진다.


결국 열쇠는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런 조절이 자유자재로 되는 사람을 뭐라고 할까? 바로 보살이다. 원효대사님도 해골물 잡수시고 열라 화나셨을 텐데, 그때 이 유행어를 생각해 내셨을지도 모른다.(어떤 넘이 여기 해골바가지를 갖다 놓은 거야!)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한반도에 이거보다 더 오래된 유행어가 있을까?



사진: Unsplash의Mikael Kriste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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