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체가 드럽게 나빠졌다

by 알뜰살뜰 구구샘

나는 악필까지는 아니었다. 어디 가서 글씨 못 쓴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엊그제 내가 쓴 메모를 봤더니 노답이었다. 글씨가 그냥 나빠진 정도가 아니라 드럽게 나빠졌다. 이젠 악필 소리를 들어도 반박 불가다.


왜 글씨체가 엉망이 된 걸까? 나이를 먹어서 그렇게 된 건가? 그럼 우리 아버지는 나보다 글씨를 못 써야 맞다.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다. 당신께선 예순이 훌쩍 넘은 지금도 글씨체가 수려하다. 한글은 물론 한자도 잘 쓰신다. 나는 어떨까? 마흔을 향해 가는 나의 글씨체는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이젠 내가 가르치는 우리 반 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빙빙 돌렸지만 결국 내 탓이다. 다른 원인 따위는 없다. 그냥 글을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정정한다. '글'이 아니라 '글씨'를 많이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새 글은 압도적으로 많이 싸지른다. 블로그에 하나, 브런치에 또 하나, 유튜브에 남기는 것도 어떻게 보면 기록이다. 근데 그건 '쓰는'게 아니다. '누르는' 거지.


엥? 글을 누르는 게 뭐냐고?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 요즘 글을 '쓴' 적이 얼마나 있지? 솔직히 다 '누른' 거 아닌가? 영어로 말하면 타이핑하는 것 말이다.


[글쓰기의 역사]

-아주 예전: 스친다(붓글씨)

-얼마 전: 누르면서 스친다(볼펜)

-요즘: 누른다(키보드, 키패드)


요즘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누른다. (write 보다는 type) 그게 키보드든 키패드든 터치패드든 뭐든 간에 말이다. 물론 아이패드에 펜슬로 쓰시는 분도 있다. 근데 애플펜슬 놓고 리얼펜슬 들어서 A4용지에 글을 쓰면? 아이패드에서 봤던 그 글씨체 안 나올 가능성이 크다. 보정 없는 생짜배기 글씨체가 까꿍! 등장한다.


글쓰기 에너지가 횡에서 종으로 바뀌었다. 붓으로 스치던 것에서 키보드를 내려 누르는 것으로 바뀌었다. 몇 시간씩 먹을 갈아야 하는 수고는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로 세기도 자취를 감추었다.


세기, 다른 말로 강도다. (강도새끼 아님.) 그러니까 획의 굵기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붓글씨는 획의 굵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과도기에 있던 볼펜도 나름 가능하다. 꾹! 누르는 거랑 살살 누르는 건 결과물이 다르다. 하지만 키보드와 키패드는 얄짤없다. 'ㄱ'글자를 세게 누르든 약하게 누르든 그냥 'ㄱ'이다.


이것 때문일까? 아버지는 완급 조절을 잘한다. 글쓰기뿐만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서 말이다. 사람 상대하는 것도 어떨 때는 굵게, 어떨 때는 부드럽게 하신다. 하지만 아들은 다르다. 냅다 내려 누른다. 완급조절 따위는 없다. 사람 상대할 때 툭탁툭탁 소리가 난다. 마치 키보드 칠 때 나는 소리처럼.


오랜만에 고등학교 시절 일기장을 봤다. 지금보다 글씨체가 훨씬 좋더라. 하루 종일 필기한다고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그 시절에 내가 지금의 나보다 강약조절을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것도 구식이 되어가는 요즘

음성인식으로 타이핑을 할 수 있는 요즘

나아가 오픈 AI가 글을 대신 써주는 요즘


고등학교 일기장에 적힌 내 글씨체가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사진: Unsplash의Aaron Bu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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