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빛 Mar 20. 2019

비오는날의 공덕시장

변화하는 도시, 변하지 않는 골목시장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은 저의 직장 생활이 처음 시작되는 곳입니다. 스물다섯부터의 눈물서리고 보람된 역사가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매일 매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곳에 당도했지요. “족발 파는 시장이 위치한 허름한 동네”로 소개했던 제 일터가 경의선 숲길,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찬란하게 변화한 건 불과 3년 안팍의 일입니다.

 



# 비오는날 술한잔 동료들과 하고픈 공덕시장


공덕역 5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걸으면 맛있는 냄새가 피어오르는 공덕시장이 펼쳐집니다. 다닥다닥 노포들이 몰려있는 이 골목에선 점심엔 생선구이 정식을, 저녁엔 족발과 보쌈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족발과 막걸리를 시키면 순대국 무한리필 서비스는 덤입니다.


기름 좔좔 흐르는 전을 직접 골라 부쳐 먹을 수도 있어요. 원조마포할머니빈대떡, 마포청학동부침개와 같은 24시간 운영하는 유명한 족발과 전 식당들이 이 골목에 모두 밀집해 있습니다. 설과 추석에는 제사용 전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어머님들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 곳이지요. 도시에서 사라져가는 시장의 시끌벅적한 모습이 가득한 장소입니다.


공덕시장에서부터 서부지방법원으로 이어진 소담길에는 국밥집과 횟집, 고깃집 등 맛집이 대거 포진해있습니다. 제철의 신선한 회를 산지 직송해 떠주는 <매일스시횟집>, 산문어와 닭을 팔팔끓여 힘이 불끈 나는 해천탕 술집 <e문어세상>, 소로 끓인 보신탕으로 원기를 충전할 수 있는 <마포우사미>, 바삭바삭한 일본식 돈가스로 줄서서 먹는 <고리돈가스>, 더욱 복날이면 찾아가 원기를 충전하는 <이박 유황오리닭한방능이백숙>같은 곳들이예요.


터줏대감 역할을 하며 미식가들을 끌어들이는 맛집들도 있어요. 겉은 바삭하고 속에선 곱이 줄줄 흘러나오는 곱창을 맛볼 수 있는 <마포 진짜원조 최대포>, 수요미식회에도 등장한 간장게장 맛집 <진미식당>,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삼합 고깃집 <진대감>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더 많은 맛집들이 있지만 익숙해져서인지 손에 꼽기가 어렵습니다.




# 회사생활은 단편영화가 아니라 장면드라마


다시 공덕 시장 쪽으로 돌아가 볼까요. 술이 오른 뒤엔 다시 그 방향을 따라 걷곤 하거든요. 지하철을 타기 위한 척 하지만, 오래된 <맨하탄>, <사하라>, <레벤호프>, <파발마> 같은 오래된 호프집과 무비라이브카페, 노래주점들이 밀집해 ‘환락빌딩’으로 불리기도 했던 제일빌딩이 있는 방향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회식 후 입가심하기 좋은 <원조마포골뱅이>, <옥상휴게소> 같은 맥줏집들이 있습니다


입사하던날, 승진하던날, 새 동료를 맞이하던날, 오래 함께 하던 동료와 헤어지던 날 등 많고 많았던 회식의 역사가 모두 이 시장골목에서 이뤄졌답니다. 갑작스레 회식 소집에 데이트를 취소해야했던 시절, 아저씨 동료들과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던 추억은 시간 속에 사라진지 오래, 회식문화도 많은 우여곡절과 함께 거듭 세련된 형태로 바뀌었으니 참 다행스러웠어요.


특히 승진하는 날은 폭탄주를 거절할수 없는 유일한 날 이었습니다. ‘과장님’으로 승격하던 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저를 데릴러왔던 남편의 표정이 생각납니다. “술을 왜그렇게 많이 마셨어!!”하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어휴....' 한숨을 푸욱 쉬더라고요.  그 한숨이 ‘그동안 고생 많았겠네. 세상의 아저씨들만큼.. ’하며 저를 위로하는 것 같았어요.


사실, 제일빌딩 근처에서 술 마신 날에는  회사 생활의 애환이 닮긴 드라마 ‘미생’이나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이 되는 느낌이기도 했답니다. 여자로 살면서 ‘아줌마’ 보다 더 ‘아저씨’에 가까운 모습이었던건 슬퍼야하는 일일까요. 어쨋든, 우리의 회사생활은 숨가쁘게 단편 영화로 끝내버릴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기에, 쌓인 감정들은 맥주 한잔으로 털어내며 장편 드라마처럼 길게 하루 하루 이어나가야 했었지요.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처럼 매일 걷던 길들도 다르게 보이는 날들이 있어요. 그 길목 위에서 애뜻한 마음을 기록하는 건 자기 삶과 도시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기록이 아닐까합니다. 머무는 길들에 대한 소박한 기록을 다른 분들도 함께 나눠주신다면 좋겠습니다.



함께 보면 좋을 글


https://brunch.co.kr/@rsalon/24




매거진의 이전글 스물여덟에 죽음을 생각해보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