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참 유별나구나 남들 다 하니까 그냥 해
“호랑아~ 호랑아~ 내 얘기 들어봐바.”
샤워를 막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호랑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지랑이 말을 시작한다.
“야 너 나 없을 때 내 방 들어오지 말랬지! 짜증나 진짜.”
“알았어 알았어~~ 알았고 일단 내 플랜을 들어봐.
1. 넌 글을 써. 이미 썼던 글 있으면 줘도 돼. 그럼 내가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줄게.
2. 너 A, B 알지? 걔네가 네 거 교정 봐주고, 삽화 디자인해주기로 했어! 아니.. 음.. 아직 답장은 안 왔지만 해줄 거야. 아니, 하게 해 놓을테니 걱정 마!
3. 내가 학교에 잘나가는 인싸 선배 내일 만나기로 했거든? 아니 이것도 아직 정해진 건 아니긴 하지만.. 만나서 니 글 적극 홍보 때려줄게! 이것도 돈워리.
4. 마지막으로 인쇄도 해야하더라구. 음, 이건 1권만 샘플로 있으면 되니까 내가 인쇄소랑 해서 알아볼게! 학교 교재 제본 뜨듯이 하면 되겠지 모. 비용도 내 용돈으로 알아서 할 테니까 절대 걱정 노노! 우리 스타 호랑작가님은 글 뚝딱 찍어내는 것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하핫! 완전 신나지 않아~?”
신나게 떠드는지랑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왜인지 호랑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추진력 쩌네 진짜. 근데 이걸 어쩌나.
1. 나는 글을 못쓰고,
2. 내 글은 재미가 없고,
3. 내 글을 팔 생각도 없고,
4. 마지막으로 나는 학교 공부 따라가기도 바빠서 공모전엔 관심이 1도 없는데.
언니도 그만 언니의 본업인 공부에 집중해야 하지 않으실까요?”
지지 않겠다는 듯 호랑도 지랑에게 말했다.
“야~그러지 말고 쓸 시간 없어서 그런 거면 너 예전에 써놓은 것들 있잖아. 분량 때문에 그래? 내가 어떻게든 엮어내 볼 테니까 단편으로 쓴 거 다 줘봐바. 내가 만들어준다니까? 그리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너는 진짜 스타작가가 될 수 있다니까. 내가 18년 긴 인생을 사는 동안 너만큼 글 잘 쓰는 사람 못 봐서 그래. 내 안목 몰라? 나야 나. 이지랄!!! 그럼 주는 걸로 알고 나 간다~잘 자~! 스타 호랑작가님”
“... 진짜..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다른 사람 감정은 생각을 못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지랑의 저런 지랄 맞은 추진력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한 번씩 꽂히면 눈이 돌아 저러는 지랑의 모습은 늘 호랑에게 부러우면서도 부담스럽기만 했다.
호랑에게 저런 면은 찾아볼 수가 없다는 걸 호랑 자신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지랑이 나가니 세상 고요해진 호랑의 공간에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호랑은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 탁상 달력은 앞으로 한 달 뒤 있을 중간고사 날짜에 시뻘건 동그라미의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서 와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네. 자, 눈 부릅뜨고 영어단어 외워야지?’
시뻘건 동그라미가 호랑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랑에게 말을 건다.
이 나라의 고등학생으로 산다는 건 많이 힘든 일이다.
학생인 본인도 알고, 본인의 선생님도 알고, 본인의 부모님도 잘 안다.
무엇을 위한 공부인가.
이런게 정말 나를 위한 공부일까, 공부를 위한 공부는 아닌건지.
등대 없는 바닷가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기분이랄까.
보이지 않는 육지는 대체 언제 닿을 수 있을까.
그들도 모두 이 입시체계를 겪었다고 했었다.
그들이 이런 고등학교 과정에서 공부한지도 적어도 20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그들도 매일 닭장 속 갇힌 닭처럼 입시체계에 갇혀 꾸벅꾸벅 병든 닭처럼 공부를 했음에도,
그 고통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20년이란 세월 동안 변한 게 없다는 건, 문제 아닐까?
'내가 문제일까 세상이 문제일까.'
‘이런 생각 할 시간에 영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지?’로 꽁꽁 싸매 이런 날선 의문을 쓸데없는 생각으로 치부해버리는 세상 속에서 호랑은 어쩔 수 없이 단어장을 편다.
과연 이 영어를 외국인에게 쓸 날이 오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답답하다.
이런 단어를 정말 외국인들은 매일매일 말하면서 산다는 건가?
세상 궁금한데 물어볼 곳이 없다.
물어보면,
‘넌 참 유별나구나. 넌 왜 그렇게 잡생각이 많니? 남들 다하니 그냥 해.'로 입막음을 하겠지.
‘언니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이렇게 가만있지는 않았을 텐데..’
본인이 어쩔 수 없는 큰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 때면 어쩔 수 없게도 항상 밝고 씩씩하고 추진력과 당당함으로 가득한 언니가 부러워졌다.
'에휴. 단어나 외우자. 딱 1시간만 하고 자야겠다.'
시계가 벌써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잠들지 못한 흔한 고등학생 호랑이였다.
'음.. 작가라..'
무심한 눈으로 영단어를 보고 있는 호랑의 머릿속에 '작가‘라는 단어가 스쳐 묘한 신비감이 가슴 속 한편에 번지는 기분이 든다.
빗줄기로 젖어버린 마음속 한 구석에 작은 등대 불이라도 켜진 듯 따뜻한 빛이 한번 반짝하는 느낌이랄까?
숨을 간신히 깔딱이며 정해져있는 길을 따라가느라 힘들기만 한 18살 평범한 한국의 고등학생에게 '길은 여기야'라고 하는 듯한 불빛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