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에겐 절대 들키면 안되는 우리만의 비밀. 쉿!
먼저,
부디 이 글을 와이프가 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도 한번 올리고.
(봐도 모른 척 해줄거지...? 킁)
시작!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작년 말 나는 한차례 쓰러졌다.
정확한 진단을 받진 못했지만, 이석증으로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옛날 아빠가 살아계실 적, 지금 내 나이쯤 한차례 쓰러진 적이 있었고,
그때 누군가가 건네준 기적 같은 알약을 먹어서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때의 아빠 나이로 다가설수록 이상하게도 아빠의 그 말이 내 귓가에 맴돌아
나는 그 알약이 뭘까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결과로 "아스피린"을 꼭 가방에 챙겨 다녔었다.
내 보기에 친가 분들이 고혈압, 뇌졸중 등의 가족력이 있었기에 아무래도 그때 아빠가 쓰러졌던 이유도 혈관 계통 문제일 것 같아, 혈류를 조절해 준다는 짧은 의학지식에 기대어 "아스피린"을 챙겨 다닌 것.
그리고 나도 아빠의 아들이어서 그랬을까?
아빠가 어릴 적부터 누누이 말했던 대로 정말 그 나이쯤 되니까 쓰러졌다.
새벽에 일어나 아들에게 분유를 타서 먹이고, 젖병을 주방에서 설거지하다 말고
나는 바람 빠지는 풍선마냥 슈슈슉 주방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아내는 출근한 상태였고, 방에는 아들이 아직 자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의식을 잃어가던 그 찰나에도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주방과 연결된 베란다 문을 열고 창문을 어떻게든 열어 창틀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때는 겨울이라 찬바람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주방 바닥에 맞댄 내 몸이 자꾸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들어서 낭떠러지 절벽 끝을 잡고 있는 산악인처럼, 베란다 창틀을 붙잡고 있었다.
혹시나 구급대가 오면 낯선 이들의 등장에 아들이 놀랄까 차마 신고도 못 하고 어떻게든 의식을 회복하려 했는데, 결국 버티다 못한 나는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내의 신고로 나는 결국 구급대를 통해 응급실로 실려 갔다. 아내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기에 구급대에 실려 가는 와중에도 방에 혼자 있을 아들 걱정을 내내 했더랬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거란 생각.
내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아도, 혼자 남을 아이 걱정부터 드는.
내가 이렇게까지 숭고한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이리 숭고해진 건지.
아무튼,
그날부로 아내는 내게 무알코올 맥주 30캔을 주문해 주었다.
평소 육아 스트레스를 풀겠다며, 아기가 밤에 잠들면 습관적으로 양주를 까는 나를 더는 허락지 않겠다는 것.
내가 양주를 선호했던 건, 하나. 빨리 마실 수 있다. 둘. 그래도 거하게 취할 수 있다. 셋. 배가 부르지 않아 살이 찌지 않을 것 같다는 되도 않는 일말의 희망(?) 이었달까.
물론 쓰러지기 전날에도 글라스로 양주를 두세 잔은 마셨던 것 같다. 안주는 내가 좋아하는 달랑 치토스 한 봉지.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무알코올 맥주를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맥주에 물 탄 그 맛에 "웩 이게 뭐야." 했던 나였지만, 습관이란 게 무서운지 육아의 고됨이 느껴지는 날은 어김없이 "치익-탁!" 맥주캔을 땄다. 무알코올일지라도.
처음에는 영 맹숭맹숭하기만 했던 무알코올 맥주도 분위기를 타는 건지, 먹다 보니 그냥 맥주 먹는 것처럼 알딸딸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아 점점 즐기게 된 것 같다.
그러다가 오늘처럼 거실 뷰를 통해 보이는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저 멀리 물이 댈 시기가 된 논밭이 보이는데 그 광경이 너무나 찬란해 보일 때. 그리고 그 순간 지금처럼 아들이 낮잠을 자고 있다면.. 뭐다?
맥주 한잔해야지.
물론 고마운 와이프가 내 걱정을 염려해서 사준 무알코올 맥주.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한 가지 비밀은...
그 무알코올에 나는 소주를 초큼, 아주 초오큼 탄다는 것. 헤헿.
파란 하늘, 초록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그 경치를 노오란 무알콜로 채우는 건 초큼, 아주 초오큼. 아쉬우니까, 란 핑계를 대본다.
육아는 힘들다.
그치만, 그래도 이렇게 좋은 날, 이렇게 알딸딸한 맥주 한잔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분명 이 글을 봤음에도 이런 나를 이해하고, 괜찮다 해줄 와이프의 인자함에 또다시 감사하다. (허락보다 용서가 빨ㄹㅏ......)
이 세상 모든 육아인들이여,
이런 날은 맥주 한 잔 갈겨........(취하니 거칠어지는 문체가 문제.)
아, 일하고 계신다구요...?
(... 또르르.. 파이팅…)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