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양c Feb 01. 2024

Ep8. 화이트 크리스마스




   

예랑이 침대에 누워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뜬 예랑이 침대 옆 창가를 멍한 눈으로 바라본다. 창 너머에 아직 자리를 피하지 못한 시린 새벽 별이 희미하게 반짝인다. 그 별 밑으로 너무도 익숙하지만, 너무나 낯설게만 보이는 숲 속 슬픔 나무들이 보인다. 나무들 위에는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린 건지 굵은 줄기들이 꺾일 정도로 켜켜이 눈이 쌓여있다. 새벽 별과 하얀 나무들 사이 빛의 공간엔 반짝거리는 하얀 깃털 같은 빛이 눈처럼 하얗게 흩날리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채 정리하지도 못한 듯 혼란스럽기만 한 예랑의 귀에 치지직 소리와 함께 낯선 소리가 들린다.

  

<메리크리스마스! 민아정의 FM라디오, 가수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노래로 문을 열어봤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선곡한 이유는... 청취자 여러분들도 창밖을 보셔서 잘 아시겠죠? 오늘은 정말 아름다운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제 기억에 이렇게까지 크리스마스에 눈이 많이 온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많은 눈이 왔더라고요. 어젯밤 잠들 때까지만 해도 밤하늘에 눈 내릴 기미가 안 보였는데, 아 맞다, 밤하늘 하니 문득 생각나는데요, 일주일 전쯤이었나? 밤하늘에 유성우 별똥별이 엄청 많이 내린 날 있잖아요, 오늘 눈 내린 걸 보니 꼭 그때 별똥별 가루들이 날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참 예뻤는데... 오늘 눈도 참 예쁘네요. 아~ 눈이 오니 한층 더 크리스마스 느낌도 나고 좋은 것 같은데, 여러분의 크리스마스 아침은 어떠신가요?>     


예랑이 작은 라디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침대에 기대앉은 등 뒤 날개가 솟아난 부위가 욱신거린다. 그 불쾌하고 불편한 통증이 자신이 얼마 전 겪은 끔찍한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일깨워준다. 깜빡 잊어버렸던 일이 기억나기라도 한 것처럼 예랑의 몸이 갑작스레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다. 떨림을 애써 참고 있는데 라디오 먼발치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예랑은 아직 흐릿한 눈에 힘을 줘 인기척의 존재를 확인하려 애쓴다.


“아빠... 엄마...?”

왜인지 다 말라 찢겨진 입술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예랑은 힘줘 소리 내어본다. 다행히 그 소리가 닿았는지 어떤 존재가 예랑에게 순식간에 다가온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구나. 아프진 않니? 등 뒤 상처는 치료 중이야. 그것 말고 외상은 보이지 않던데, 혹시 다른 아픈 곳 있니?”

예랑의 머리는 아빠와 엄마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믿기 싫다는 듯 다시 한번 그를 향해 아빠와 엄마라 한번 더 뱉어본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예랑이 다시 한번 눈에 힘을 줘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존재의 정체를 살펴본다.

제일 먼저 칠흑 같은 어둠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듯 온통 새까만 어둠이 보인다. 조금 더 눈길을 들어 올려 검은 존재의 얼굴을 확인한다. 역시 새까만 빛이 은은하게 풍겨 나온다. 단 하나, 눈으로 보이는 곳만 새빨갛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예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 존재는 예랑의 머리 위 아주 천천히 깜빡거리고 있는 순백의 천사의 링을 쓰다듬는다.


“흐음... 나를 아니?”

금방이라도 빨간빛이 쏟아질 것 같은 입이 열리더니 기괴한 목소리로 예랑에게 말을 건다. 예랑은 그 모습이 기괴하다 느껴지지만, 왜인지 겁나진 않는다.


“누구...? 삼신님...?”

물론 예전 아빠를 만나러 왔을 때 삼신을 봤던 예랑이었지만, 분명 천사가 아닌 게 분명한, 새까만 암흑과 새빨간 빛뿐인 존재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나지막이 속삭여본다.

 

“허허. 아니지, 아니야. 음... 나는... 음, 뭐 상관없겠지. 난 염라야...”

그가 왜인지 자신의 존재를 밝히며 예랑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예랑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음...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그래, 나는 니가 아는 삼신의 친구야. 가깝기도, 멀기도 하지. 지금은 이 정도만 알고, 그냥 편하게 염라라 부르렴. 반가워, 크크.”


염라가 예랑을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웃음소리를 들은 예랑은 그의 웃음소리가 기괴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왜인지 그의 웃음소리에 자신의 등에 찔러 들어오던 아빠의 새까만 천사의 링을 움켜쥐고 도망치라고 간신히 말했던 주랑의 모습이 떠오른다. 왜인지 주랑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랑이는...”

예랑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인다.

 

“주랑? 아, 지옥에서 왔다는 그 니 형제를 말하나 보구나? 아... 그 아이는 이제 이곳에 없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단다. 그리고 이곳, 그래 천국에 다시는 오지 못하게 될 거야. 음...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어디 먼저 등에 상처 좀 보자, 이리 앉아볼까?”


염라가 예랑의 어깨를 지탱해 예랑을 기대어 앉힌다. 어둠뿐인 손을 드는가 싶더니 예랑의 등을 어루만진다. 예랑은 처음 느껴보는, 아니 정확하게는 아빠의 링에 꽂혔던 그때 그 기분 나쁜 뭉클한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다시 한번 느낀다. 다만, 그때는 얼음처럼 차갑고 불쾌한 느낌이었다면, 왜인지 염라의 손길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 덕분인지 계속해서 떨리던 몸이 조금씩 안정되는 것 같다.


“흠... 이런 이런.... 완전히 상처가 사라지진 않을 것 같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볼게. 궁금한 게 많지? 내가 한동안 이곳에 머물 것이니 차근차근 물어보렴. 시간은 많을 것이니...”

기괴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염라라고 자신을 소개한 존재가 나지막이 속삭인다.


“삼신님은... 요?”

예랑이 염라에게 묻는다. 염라는 삼신을 묻는 예랑에 측은한 마음이 든다. 지옥의 존재인 자신에게 왜 이런 뭉클한 느낌이 당연하게 드는 건지 이해가 안 되지만 이상하게도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또한 자신은 알지 못하는 위대한 세 신의 큰 뜻이 있으리라 짐작할 뿐.


“삼신은 지금 인간계에 가있어. 깨진 천사의 약속과 소멸한 천사의 슬픔을 수습해야 하니까... 저 라디오에서 인간이 하는 말처럼 쉽진 않은 듯 하지만...”

염라가 계속해서 예랑의 상처 난 등을 어루만진다. 한참을 쓰다듬던 염라는 그날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짙은 한숨을 내쉰다.


출처: Pinterest



이전 08화 Ep7. 그리고 그 어느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