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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Jan 25. 2024

Ep7. 그리고 그 어느 날




그렇게 평범한 날들이 흘렀다.

엄마 천사는 인간계의 수없이 많은 인간의 혼을 슬픔 나무의 숲으로 인도했고, 아빠 천사는 첫눈 같은 따뜻함으로 슬픔 나무의 숲을 지켰다. 그리고 가끔은 삼신을 따라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아기 악마 주랑과 아기 천사 예랑도 인간계 여느 형제들처럼 치고받고 놀며 잘 지냈고, 그런 아기들을 아빠와 엄마 천사는 늘 흐뭇하게 바라보던 보통의 날들이 이어졌다. 지극히 천국다운 평화가.

그리고 그 어느 날,


“아빠,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나랑 주랑이도 인간 세상 구경시켜 주기로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나 꼭 갈 거야. 가서 착한 인간들한테 나도 선물 줄 거야.”

크리스마스를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슬픔 나무의 숲 속에서 인간의 혼을 구경하던 예랑이 자신의 빛의 고리를 반짝 거리며 아빠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크리스마스? 야! 예랑! 요샌 인간들 크리스마스 믿지도 않는다더라. 우리한테나 대단한 날이지 인간들은 관심도 없다구. 돈이나 밝히는 인간들.”

아빠의 반대편에 서있던 주랑이 질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링의 회색빛을 번쩍이며 예랑의 말을 받는다.

“주랑아,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야. 신성한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딨어... 그리고 인간들도… 쿨럭쿨럭.”

아빠의 갑작스러운 기침에 슬픔 나무의 숲에 내리던 눈이 멈춘다.


“아빠, 괜찮아? 힘들면 눈 내리는 거 그만해. 요즘 아빠 목소리도 이상해지고, 힘든 거 같아. 그만해.”

예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빠를 올려다본다. 아빠의 머리 위 링의 고리가 오늘따라 한결 옅어진 것 같아 보인다. 날개도 왜인지 푸석해 보인다. 문득 처음 봤던 주랑의 낯선 날개 그때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야, 예랑! 당연히 괜찮지! 너 아빠 몰라? 무려 이 커다란 숲을 주관하시는 천사라고. 대천사도 우리 아빠한테는 안될걸? 그치~ 아빠?”

주랑이 예랑을 향해 놀리듯 말한다. 하지만 주랑의 말과 달리 아빠는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자 잠시 멈췄던 숲의 나무를 향해 쏟아지던 눈이 평소와 달리 세차게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한다.


“아빠… 괜찮지…?”

자신의 믿음에 아빠의 확고한 답을 기대했던 주랑이 평소 하듯이 아빠의 등에 올라타 왼쪽 날개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그런데 그 순간,

눈이 멈춘다. 슬픔 나무의 숲 전체가 멈춰버린 것 같은 정적이 흐른다.


“...”

주랑의 손에 닿은 아빠의 몸이 평소와 달리 딱딱하게 느껴진다. 아빠의 천사의 날개가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주랑의 회색빛보다 더 칠흑 같은 어둠이 아빠의 날개를 한순간에 잡아먹는다.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주랑이 세차게 아빠의 등 이곳저곳을 만져 흔든다.


출처: Pinterset


“아빠!!!”

주랑의 옆에 있던 예랑도 놀라 아빠에게 황급히 달려들어 흔들어댄다. 그러자 예랑의 손에 닿은 아빠의 반대쪽 날개가 선명한 천사의 빛을 내뿜는다. 한쪽 날개는 타버린 듯 새까맣게, 다른 쪽 날개는 하얀 눈처럼 새하얗게 빛난다.

아빠의 눈이 새빨갛게 물든다. 아빠의 입술이 새까맣게 물든다. 아빠의 팔이 새빨갛게, 다른 팔이 새까맣게, 반대쪽 다리는 다시 새빨갛게, 그리고 다른 쪽은 다시 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든다.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에 예랑은 덜컥 겁이 난다. 겁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껴본 천사 예랑이 두려운 듯 아빠로부터 떨어져 뒷걸음질 친다. 마음속에서는 아빠의 곁에 꼭 붙어 아빠를 지켜야 한다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리지만, 겁먹은 자신의 몸이 아빠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떨어져 버린다.

그런 자신이 낯설고, 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예랑과 달리 주랑은 아빠를 더 악착같이 붙잡고 괜찮냐 소리치며 미친 듯이 흔들어댄다. 아빠에게서 뒷걸음질 치는 예랑을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어서 아빠를 살리라며. 자신처럼 아빠에게 꼭 붙어 아빠를 지키라며 무언의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왜인지 주랑의 손길이 닿는 족족 아빠의 몸이 암흑으로 물들어간다. 인간 모습을 유지하던 아빠의 형상이 결국 천사의 본모습인 눈동자로 풀려버린다. 수백수천 개의 눈동자가 주랑을 뿌리치고 슬픔 나무의 숲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예랑과 주랑의 눈에 평소의 모습과 달리 미친 듯이 돌고 있는 아빠의 눈동자가 들어온다. 공중에서 마치 괴롭다는 듯 기괴한 쇠 긁히는 소리로 울부짖고 있다.

그러다 맨 왼쪽 끝에 있던 작은 눈동자에서 새빨간빛이 깨어져 나온다. 빨간 빛이 사그라들자 그 눈동자가 까맣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것을 시작으로 하나 둘 까만 암흑이 눈동자들을 물들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아빠의 모든 눈동자가 새까맣게 변해버린다. 눈동자 위에 떠있던 아빠의 거대한 빛의 고리마저 새까맣게 변한다. 그렇게 온통 암흑으로 물들어버린 아빠 천사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갑자기 모든 움직임을 멈춘다. 그러자 기괴한 소리도 사라지고 슬픔 나무의 숲이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인다.


“예랑!!! 주랑!!!!!”

바로 그때 숲의 입구 쪽에서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랑은 지금껏 그렇게 큰 소리를 내는 인간도, 천사도 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빛으로 자신의 아기 천사와 아기 악마의 곁에 날아든 엄마 천사가 다 타버린 듯 새까매진 아빠와 아기들 사이를 막아선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아빠의 눈동자 중 가운데 있는 가장 거대한 눈동자 하나가 새까만 눈을 번쩍 떠 움직이기 시작한다.


“큭.”

처음 보는 새빨간 눈동자를 올려보던 찰나의 순간, 예랑의 눈에 자신의 앞을 지켜섰던 엄마 천사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그 뒷모습에서 새빨간 빛이 작은 점으로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엄마 천사의 등 뒤에 숨어있던 예랑의 온몸을 뒤덮어 버린다. 마치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예랑의 숨이 턱 막힌다.

언제 날아든 건지, 아빠의 눈동자 위에 있던 새까매진 빛의 고리가 날카로운 칼의 형태가 되어 엄마의 등에 깊게 꽂혀있다. 엄마는 그 칼날이 자신을 관통해 두 아이를 향해 날아드는 것만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두 손과 두 날개로 꽉 움켜쥐고 있다.

엄마 천사의 날개가 꺾이고 엄마 천사의 링이 세차게 깜빡이는가 싶더니, 이내 엄마에게서 새어 나오던 새빨간 빛이 꺼져버렸다. 천사의 안에 있던 빛이 새빨갛다는 것도, 그리고 그 빛이 이렇게 꺼져버릴 수 있다는 것 모두 예랑은 처음 알게 되었다. 아니, 예랑뿐 아니라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천사가 소멸하는 일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엄마...?”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예랑과 주랑이 동시에 중얼거린다. 그런 두 아이의 눈에 엄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눈은 물론, 코와 입 모든 곳에서 핏빛의 빛이 간신히 새어 나오고 있다. 고통에 일그러진 채, 그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히 느껴진다.

보기만 해도 마음속에 평안을 전해주는 은은한 미소.

천사의 눈동자를 처음 맞이하면 어김없이 놀라는 인간의 혼을 안심시키는 평안한 그 미소.


하지만 이내 그 미소가 흩어진다. 갈기갈기 찢겨진 엄마의 미소가 공중으로 흩날려 예랑과 주랑의 얼굴에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꺼진 빛의 가루로 사라져 버린다.

마치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던 아빠의 빛의 가루 눈꽃들처럼.

그렇게 자신과 두 아이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그 눈꽃들처럼.


어린 예랑의 눈 안에서 빛의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눈에서 처음 흘러내리는 빛의 방울을 본능적으로 손으로 닦아내던 예랑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자신의 몸 안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어서 도망치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왜인지 날개가 펴지지 않는다. 꿈쩍할 수가 없다. 공중에 떠있는 도저히 아빠로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다음 목표를 찾겠다는 듯이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져 예랑이 고개를 돌린다. 평소 회색빛을 내던 주랑의 몸이 왜인지 새까맣게 변해있고, 그 새까만 빛 속에서 더 새까만 암흑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게 보인다. 그 빛의 가루들이 날려 예랑의 몸에 닿자 몸이 너무 따갑다. 그 따가움 때문인지, 마음속 목소리 때문인지 정신이 번쩍 든 예랑이 날개 펴는 것을 포기한 채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한다. 몸을 돌리던 찰나 예랑의 눈에 들어온 주랑의 눈이 아빠의 눈동자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더 새까맣게 변해있는 게 보인다. 예랑이 간신히 한 발자국을 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엄마를 관통했던 아빠의 새까만 빛의 고리가 예랑의 뒤를 향해 쏜 화살처럼 맹렬히 날아든다. 처음 느껴보는 너무도 차가운 감촉이 예랑 자신의 날개와 뒷목 사이에 닿는 느낌이 든다. 예랑의 무릎이 꺾이고 바닥으로 풀썩 주저 앉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때 주랑의 힘겨워하는 목소리가 예랑의 귀에 닿는다.

“도망가.. 내가 잡고 있을 테니 지금...”

예랑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의 등 뒤를 막아 선 주랑의 모습이 보인다. 주랑이 자신의 새까매진 손을 뻗어, 자신의 등뒤에 살짝 맞닿아있는 아빠의 칼날 같은 빛의 고리를 움켜쥐고 있다.


주랑이 처음 들어보는 쇠 갈리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로 웃어대며 새까만 이빨을 드러내며 찢어지는 듯한 웃음을 얼굴에 머금고 있다. 지금까지 같이 지내온 주랑이 맞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주랑의 모습과 웃음소리에 예랑은 정신이 흐릿해진다. 그리고 그 찰나, 숲의 입구를 향해 폭풍처럼 떨어져 내리는 은색과 붉은색, 두 줄기의 빛이 예랑의 흐릿해진 눈에 들어온다.


“삼신님... 살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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