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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Jan 18. 2024

Ep6. 눈



눈이 내린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빠 천사가 자신의 찬란한 빛으로 인간계에서는 눈이라 불리는 하얀빛의 가루를 따뜻하게 날리고 있다. 어느새 슬픔 나무의 숲 속 수많은 나무들 위로 하얀빛의 눈꽃들이 가득 내려앉는다. 그 모습을 숲 어귀에서 지켜보던 어린 예랑은 마음이 따뜻해진다. 행복하다.


“엄마, 다음번엔 나도 인간 세상 데려가주면 안 돼? 진짜루 딱 한 번만. 나도 가보고 싶어.”

아기 예랑이 이제 막 임무를 마치고 인간의 혼 하나와 슬픔 나무의 숲에 도착한 엄마 천사를 보며 뾰로통한 얼굴로 말한다.


“음, 예랑이도 언젠가는 엄마나 아빠의 임무를 맡게 될 테니까 그때는 원 없이 갈 수 있을 거야.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니까 그때까지는 아기 천사는 아기 천사답게 얌전히 있어주세요~”

엄마가 익살스러운 손길로 예랑의 볼을 살포시 꼬집으며 말한다.


“인간들이 뭐가 좋다고 그런데를 가고 싶어 해? 난 싫어! 여기가 좋아.”

엄마의 반대편에 있던 아기 악마 주랑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천사의 말로 엄마와 예랑을 향해 말한다. 엄마는 그런 주랑의 볼도 예랑에게 했던 그것과 같이 살며시 꼬집어준다. 그러자 처음 그때처럼 주랑에게 닿은 손 끝에 저릿한 느낌이 전해온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왜인지 아기 악마에게 닿으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찌릿한 저릿함을 애써 모른척한다.


“근데 엄마, 아빠는 왜 저렇게 하얗게 빛을 뿌리는 거야? 저러면 힘들지 않아? 빛을 계속 써야 하잖아.”

주랑에게 닿으면 어김없이 순간적으로 표정이 사라지는 엄마의 얼굴을 눈치챈 예랑이 황급히 주랑의 볼에 닿았던 엄마의 손을 잡아떼며 묻는다.


“그러게. 힘드실 텐데 계속하시네. 너희들 그거 아니? 인간 세상에서는 저 빛을 눈이라고 부른단다. 신비롭고, 따뜻한 그 눈을 인간들은 좋아하지. 그리고 인간들이 좋아하니까, 아빠는 계속하시는 거래. 인간이 행복하면 당연히 천사도 행복하거든. 그리고 엄마도 아빠의 눈이 참 좋아. 따뜻하거든. 인간계에 내려갈 때 아빠의 저 눈이 엄마를 지켜주는 것 같기도 하고 말야. 그리고 아빠의 저 눈은 분명 우리 예랑이, 주랑이도 지켜주실 거야.”

엄마가 자신의 눈앞에 꽃잎처럼 흩날리는 눈꽃송이를 하나 잡아 예랑에게 건네며 말한다.


예랑의 아빠 천사는 <슬픔 나무의 숲>을 총괄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끝까지 펼쳐져 있는 숲의 나무들을 관리하고, 그 숲에서 혹시나 길을 잃은 천사와 인간의 혼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가끔은 자신 스스로도 인간의 혼에게 슬픔의 나무를 안내하기도 한다. 물론, 그가 담당하는 인간의 혼은 극히 특별한 경우에 한했지만.


그리고 예랑의 엄마 천사는 그 숲으로 오는 인간의 혼을 인간계에서 숲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슬픔 나무의 숲에 올 자격이 되는 인간의 혼이 엄마 천사에게 배정되면, 엄마 천사는 정해진 일시에 정확히 맞춰 인간계에 내려가 인간의 혼을 이끌고 숲으로 돌아와 해당 나무의 다른 천사에게 인도하는 역할이다. 그 인간의 혼은 인간계에서 이미 죽었을 수도, 아직 숨이 붙어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슬픔 나무를 거치면서 그 인간의 혼이 내린 결정이 실제 인간계의 생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천사라면 응당 그렇듯이 인간 세상에 가고 싶어 하는 예랑을 귀엽다는 듯 내려보는 엄마 천사의 눈에 저 멀리 천사의 그것보다 훨씬 밝은 은색 빛이 숲의 입구에 떨어져 내려앉는 것이 언뜻 스친다. 예랑과 주랑의 눈에도 그 빛이 들어온다.


“엄마, 나는 저 천사 싫어. 왠지 으스스하고 무서워. 주랑이처럼 빛도 회색이고...”

엄마와 함께 내려앉는 빛을 발견한 예랑이 구시렁거린다. 엄마 천사는 예랑의 말에 혹시 주랑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돼 황급히 예랑을 품에 안아챈다.


“삼신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예랑아? 삼신님이 오셨으니 아빠는 오늘도 외출하시겠네. 우린 먼저 집으로 갈까?”

말하는 엄마 천사의 눈에 거대한 날개를 펼쳐 숲의 입구를 향해 빠르게 빛으로 날아가는 아빠 천사의 모습이 들어온다.


“피- 아빠는 삼신님만 오면 맨날 안 들어오더라.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예랑이 입을 삐쭉 내밀며 말한다.


“음... 우리 예랑이, 그래 좋아. 앞으로 100년만 지나고 아빠가 삼신님이랑 뭐하는지 알려줄게! 약속!”

엄마 천사가 상냥한 목소리로 예랑을 달랜다.


천사의 약속은 귀하다. 절대 그 약속은 깨지지 않는 법이므로.

하지만 인간과 달리 천사에게는 짧기만 한 그 100년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한다. 일어나선 안될 일이 일어나게 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슬픔 나무의 숲 입구.


“오늘 인간계로 탄생시킬 인간 혼의 수는 많지 않네. 자네는 금방 끝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게야. 어째 점점 줄어드는 거 같아. 미약하긴 하지만.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휴.”

숲의 입구 어귀 슬픔 나무 한 그루를 쓰다듬으며 은빛 단발의 삼신이 말한다.


“그런가요? 큰일이군요. 인간계가 불안정해지면 천국이나 지옥도 영향을 받을 텐데...”

빛으로 막 삼신 앞에 도착한 아빠 천사가 숨도 고르 못한 채 삼신에게 말을 건넨다.


“뭐, 아직은 미미하니까. 그나저나 저 아인가? 이번에 헬 게이트로 넘어온 아이가?”

삼신이 저 멀리 엄마 천사 곁에 있는 주랑을 가리키며 말한다.


“아, 주랑이요? 네, 맞습니다. 예랑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래도 천국 생활에 잘 적응해 가는 것 같습니다. 말수는 아직 별로 없지만요.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아, 삼신님.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지옥 악마는 칠흑같이 까맣다고 들었는데, 왜 저 아이는 회색빛인지...”

아빠 천사가 마침 궁금한 게 떠올랐다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 아직 어려서 그래. <염라>에게 듣기론 지옥 악마들은 원래 옅은 어둠이었다가 지옥의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를 처음 죽이고 나면 새까매진다더군. 주로 인간을 죽이고 나면 까매진단 말일세. 그 모습 안보는 게 나을걸? 흠… 저 아이처럼 지옥 악마가 천국에서 자란 경우는 처음이라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저 아이가 부디 회색빛으로 계속 머물길 빈다네. 악마의 칠흑을 뒤집어쓴다는 건, 누군가에겐 비극이 되었다는 것이니까. 돌이킬 수 없는 비극말일세, 쯧.”

예상치 못한 삼신의 말에 아빠 천사가 흠칫 놀란다. 가만히 듣던 아빠 천사는 마음속으로 절대로 주랑이의 회색빛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한다. 천사답게 순수하게.


“그나저나 이렇게 눈을 뿌려대면 자네가 갖고 있는 빛에 영향이 가는 걸 모르는가? 물론 이곳 천국 지천에 깔린 게 빛이긴 하다만 그래도 힘들 것인데...”

삼신이 슬픔 나무의 숲에 흩날리는 눈을 모아 손으로 눈꽃을 만들어 보인다.


“하하. 그냥… 취미죠 뭐. 그리고, 인간들은 눈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특히 첫눈 말입죠. 안 그래도 여기 오는 인간의 혼은 처음 보는 천사의 눈동자 수백수천 개를 마주해서 놀랐을 텐데 이렇게 눈이라도 내려주면 조금은 안심하지 않겠습니까요. 저는 그렇게 첫눈처럼 인간들은 지켜주고 싶습니다. 물론 우리 예랑이 주랑이도요.”

삼신에게서 눈꽃을 건네받은 아빠 천사가 다시 눈꽃을 눈으로 바꾸어 공중으로 날리며 말한다.


“악취미네. 인간들이 눈을 좋아하는 거 같긴 해도, 순수함을 잃은 인간들은 눈 오는 걸 싫어하기도 한다고.”

삼신이 자신의 은빛 단발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며 말을 잇는다.

“그래도 예쁘긴 하네. 아, 인간들은 내가 처음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 아기일 때는 눈을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왜 그렇게 변하게 되는 건지. 인간들이란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지쳐.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바로 이동가능하지?”

삼신의 눈빛이 순간 번쩍이며 아빠 천사를 응시한다. 아빠 천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삼신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빠 천사가 거대한 날개를 펼쳐 그 뒤를 따른다. 그들이 사라지자 슬픔 나무의 숲에 내리던 눈이 일순간에 사라진다. 나무에 내려앉아있던 은빛 눈송이들만이 찬란하게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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