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의 사진을 마주한 예랑이 자신의 새하얀 입술을 질끈 깨문다. 당장이라도 입술 안에서 흐르던 창백한 빛들이 찢겨져 새어 나올 것만 같다. 어릴 적 그때의 고통이 떠올라 숨통이 조여 온다.
-3천 년 전, 슬픔 나무의 숲.
“아빠, 나도 엄마랑 같이 인간 세상 구경 갈래! 나 이제 인간 모습 하고도 이 링도 돌릴 줄 알아. 자 봐바!”
앳된 인간 남자아이의 얼굴을 한 예랑이 자신의 머리 위 자그마한 링을 빙글빙글 돌리며 아빠 천사를 향해 웃으며 말한다. 그런 예랑을 내려다보던 예랑의 아빠와 그 옆에 선 엄마 천사가 빛으로 가득한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마치 위대한 세 신의 그 빛처럼.
예랑은 탄생한 지 이제 막 9백 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 예랑처럼 정상적으로 인간의 생을 마치고 4번의 환생을 거쳐 작은 아기 천사로 탄생하게 된 존재는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맡는 천사들이 천년동안 돌보게 되어있다. 그 천년동안 인간이나 강아지,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하는 방법, 천사의 고리를 다루는 방법 같은 천사로서의 기본적인 능력들을 비롯해, 궁극적으로는 아빠 혹은 엄마 천사의 임무를 아기 천사가 계속 이어가게 하기 위한 다양한 능력들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예랑은 이제 막 인간의 모습으로 천사의 링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었다.
신들의 대전쟁이 끝나고, 사라진 수많은 신들의 임무를 대신하기 위한 천사와 악마들의 탄생과 천국, 지옥, 인간계의 체계가 안정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다만, 천국 천사의 수보다 지옥 악마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천국 천사가 소멸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음에도 왜인지 지옥 악마에 비해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있는 이 불안정한 상태에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면 안 된다는 조급함만 있었을 뿐.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세계 간 균열의 틈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대로 가다간 인간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의 균형이 뒤틀릴 수 있다는 작은 염려들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세계 간 균형의 틈을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위대한 세 신은 다양한 논의를 이어갔고,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일단 지옥의 어린 악마들을 천국으로 강제 이민시켜, 천사와 악마의 수의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 이 소식은 천사들의 마음에 불안감을 주었으나, 그들은 이내 괜찮을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에 물들어버렸다. 그때만 해도 천사는 불안감이라는 감정조차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었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젖과 꿀로 묘사된 천사의 빛이 천국 어디에든 넘치고 넘쳐나던 풍요의 때였으니까.
그렇게 처음에는 소수의 천사 가족에게 어린 악마들을 할당해 보고, 적응에 성공하면 점차 그 수를 늘린다는 계획에 따라 마침내 헬게이트가 처음으로 열렸다. 그리고 예랑의 가족에 지금 막 어린 악마 하나가 도착했다.
“안녕?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해!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답게 생겼구나. 천사보다, 인간보다 더. 헬 게이트를 넘어올 때 힘들진 않았니?”
예랑의 엄마 천사가 눈앞에 마주한 작은 존재에게 감탄하며 상냥히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딱 예랑만 한 키에 아름다운 인간 형체를 하고 있는 작은 악마가 서있다. 머리 위에는 천사의 그것과 비슷한 링의 고리가 떠있고, 마찬가지로 천사의 그것과 같은 날개를 접어 등 뒤에 감추고 있다.
한 가지 다른 건, 그 모든 색이 천사의 하얀빛이 아닌 어두운 회색 잿빛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사, 인간과 달리 악마의 뒤에는 원숭이의 그것과 비슷한 작은 꼬리가 붙어있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비록 그동안 아빠와 엄마가 임무를 수행하는 장소인 <슬픔 나무의 숲> 속 나무 뒤에 숨어, 수많은 인간을 훔쳐봤던 어린 예랑이었지만, 지옥에서 왔다는 처음 보는 낯선 존재를 마주한 첫날, 그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예랑은 아빠의 뒤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요. 정말 아름답네요. 천사들 중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꿀 수 있는 천사도 못 본 것 같아요. 악마는 새까맣다던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회색빛인 것도 신비로워 보이고요. 아, 예랑아. 이리 나와 인사해야지? 이쪽은 앞으로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될 아기 악마야. 넌 이름이 뭐니?”
예랑의 아빠 천사가 몸을 숙여 뒤에 숨은 예랑의 손을 잡고 아기 악마의 앞으로 이끌며 말한다.
“이름...?”
아기 악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 이름. 지옥에서는 다른 악마들이 너를 뭐라고 불렀지?”
엄마 천사가 아기 악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말한다. 순간 아기 악마에게 자신의 손이 닿자 처음 느껴보는 손끝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혹시 아기 악마에게 실례가 될까 애써 모른 척 한 채 황급히 손을 뗀다.
“그런 거 없어.. 지옥은 지옥일 뿐이니까. 악마는 악마일 뿐이야.”
아기 악마의 잿빛에 파묻힌 듯한 목소리가 울린다. 너무도 아름다운 겉모습과 달리, 잿빛 목소리에 아빠와 엄마 천사 모두 당황하는 눈치다.
“아.. 그래? 천사들도 어릴 때가 아니면 딱히 이름이 필요하진 않으니까... 비슷한가 보구나. 어디, 그래도 부를 이름을 하나 정하는 게 좋겠는데... 앞으로 같이 지내려면 말이야.”
엄마 천사가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짓는다.
“어디, 우리 예랑이랑 같이 지내야 하니까 비슷한 이름이었으면 좋겠는데... 형제처럼 말야. 뭐가 좋을까...”
아빠 천사가 엄마 천사와 비슷한 표정으로 고민하며 말한다.
“그러게요... 음.. 예랑이의 ‘랑’을 따고, 해주신 님의 ‘주’를 따서 <주랑>이라 부르는 건 어때요? 예랑이랑 주랑이.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말을 건네는 엄마 천사의 링이 반짝 거린다.
“오! 좋다 주랑이! 반가워 주랑아. 우리랑 예랑이랑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알았지?”
아빠 천사가 아기 악마 <주랑>의 옆구리에 손을 끼워 번쩍 들어 올리며 천사 특유의 환한 웃음을 건넨다. 그런 아빠 천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주랑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것처럼.
한 가지 이상한 건, 엄마 천사와 달리 아빠 천사는 주랑에게 손을 댔음에도 저린다거나 하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다. 다른 세계에 살던 존재가 처음 맞닿으면 응당 불편한 감촉이 들어야 하는 것임에도 아빠와 주랑 사이엔 그게 없었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음에도 그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천사와 악마가 평화롭게 서로를 맞닿은 일이 처음이었기에.
그 모습을 옆에서 가만 올려다보던 예랑의 얼굴에도 엄마 아빠의 그것과 같은 환한 웃음이 번진다. 뭔가 마음속에 처음 느껴보는 불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내 잊어버린다. 천사는 그런 불편함이 뭔지도 모르는 존재들이었기에.
하지만 예랑은 그 이후 평생 그때 처음 느꼈던 그 불편한 저릿함을 잊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그렇게 악랄한 저릿함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