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는 넓은 운동장, 그 오른쪽 한편엔 학생들의 공연을 위한 네모반듯한 커다란 하얀 무대와 그 무대 주변으로 설치된 철골 구조 위 얼기설기 매달린 조명이 번쩍이고 있었다.
무대 뒤로는 어느덧 새빨간 노을에 물들어 버린 붉은 하늘이 그림 같은 배경 그려내고 있었고, 무대 앞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각기 다른 색의 교복들이 얽히고설켜 그때의 풋풋함만이 내뿜을 수 있는 분홍 초록한 소란스러움을 지어내고 있었다.
“야, 니네 이리 와봐. 하, 요즘엔 이런 범생이들도 오네?”
한눈에 딱 봐도 나 좀 논다는 걸 드러내지 않으면 참을 수 없다는 걸 뽐내는 힘껏 줄인 하얀 블라우스 상의와 무릎 위 간신히 매달려 있는 줄인 교복 치마를 입은 학생이 콤팩트 파우더를 얼굴에 찍어 화장을 고치며 말한다.
“네..? 저.. 저희요?”
분명 같은 교복인데도 누가 봐도 '저 노는 학생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듯한 펑퍼짐한 치마를 날리며 뒤돌아선 뿔테 친구가 간신히 말을 꺼낸다.
“어. 니네. 야! 니네 지금 야자 시간 아니냐? 뭐 한다고 이런 것들까지 이런 데를 와서 학교 망신을 시키나. 쪽팔려서 원.”
파우더 콤팩트 뚜껑을 딸깍 닫으며 말을 잇는다.
“야야, 걍 둬라 좀. 니가 선생도 아니고 왜 우리 학교 애들만 보이면 시비야?”
옆에 있던 지랑이 귀찮다는 듯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을 꺼낸다.
“어? 호랑...?”
뿔테 친구 옆에 서 있던 도끼빗 친구가 그런 지랑을 보고 놀란 눈을 치켜뜨며 혼잣말을 간신히 내뱉는다.
“뭐? 호랑? 뭐래 이게. 니네 호랑이 아냐? 그럼, 나랑 동갑 실화? ㅋㅋ 어이없어라. 야, 그렇게 순해 빠진 얼굴로 이런데 누가 오라 그랬어? 니들은 한창 공부해야 할 때 아니냐? 어이없네.”
분명 호랑과 똑같은 얼굴인데, 호랑과 달리 붉은빛이 맴도는 갈색 긴 생머리를 어깨 밑까지 흩뜨린 채 말을 잇는 지랑의 모습에 뿔테 친구와 도끼빗 친구는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동갑내기임에도 자신들과는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다른 압도적인 지랑 앞에 둘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어? 야! 니네 거기서 뭐 해! 손만 씻고 나온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여기까지 와있네. 한참 찾았잖아. 사람 진짜 많다, 그치?”
두 친구를 발견하고 소리치며 달려오던 호랑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걸음을 멈춘다.
“하? 이게 누구야? 야! 이호랑! 너 미쳤냐? 야자 째고 니가 여기서 왜 나와? 개어이없네.”
친구들 앞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곤 누가 들어도 시비조의 말을 내뱉는 지랑과 마주한 호랑은 깜짝 놀랐다.
“뭐래. 이지랄 넌 왜 여깄 는데? 그리고 너 내가 밖에서 아는 척하지 말랬지? 재수가 없으려니까. 내 친구들이랑은 뭐 하고 있는 건데? 볼 일 없지? 우린 간다. 야야. 우리 저쪽으로 가자. 하!”
호랑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고, 풀 죽은 채 고개 숙이고 있는 자신의 두 친구의 어깨를 잡아끌며 지랑을 향해 말했다.
“야, 내가 걔네 구해준 거거든? 고맙다곤 못할망정. 저 성질머리 하여튼. 야, 너 학원은? 학원 갈 시간 아님?”
지랑이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 호랑을 막으며 말한다.
“뭐래. 지는. 아! 너 나 여기서 봤다고 엄마한테 말하면 죽을 줄 알아! 진짜.”
호랑은 지랑을 향해 지지 않겠다는 듯 뒤돌며 말한다.
“야, 쟤가 그 니 쌍둥이 언니야? 진짜?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진짜 왜리 다르냐?”
지랑과 조금 멀어지자 뿔테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호랑에게 속삭인다.
“그러니까. 와 나 완전 개 놀램! 진짜... 얼굴은 똑같이 생겼는데, 머리 스타일, 교복 줄인 거, 그리고 화장까지. 완전 다르다 진짜.”
호랑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던 두 친구가 노는 친구 무리에 섞여 있는 지랑을 향해 당당히 소리치는 호랑의 모습이 신기해 한참을 멀뚱히 뜬 눈으로 호랑을 향해 말한다.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저런 또라이랑 말 섞어 좋을 게 없다니까. 그냥 피해피해.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에이, 재수가 없으려니.”
호랑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대며 말을 내뱉었다.
“근데 쟤 저렇게 머리 길러도 학교에서는 왜 안 잡는 거야?”
뿔테 친구는 그 와중에 궁금한 건 못 참겠다는 듯 호랑에게 묻는다.
“쟤 하는 거 봐. 저게 누구 말 듣겠냐? 아주 밤마다 샤워하면서 목욕탕에 머리카락 한가득이라고 머리 좀 밀라고 그렇게 말해도 저 모양. 노답. 아무튼 너네 절대 쟤네 무리랑 말도 섞지 마. 더럽다 더러워!”
I guess Peter Pan was right
호랑이 씩씩대며 한참 친구들에게 소리치고 있던 그때,
멋진 남학생의 허스키한 목소리 한마디가 마이크를 타고 들어가 스피커를 통해 나지막이, 하지만 강하게 뻗어 나갔다.
그러자 노란 모래가 깔린 운동장과 붉은 노을 하늘 사이, 가득 찼던 교복들이 뿜어내던 분홍 초록한 소란스러움이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찰나의 그 고요함 사이를 뚫고 하나의 감미로운 화살로 변해, 호랑의 귀에 닿는가 싶더니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가 호랑의 가슴속 마음 한가운데에 정확히 꽂혀버렸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순식간에 호랑의 마음에 그의 감미로운 수십 발의 화살이 숨 막히게 이어져 날아와 박히기 시작했다.
Yes, I guess peter pan was right
Growing up's a waste of time
So I think I'll fly away
Set a course for brighter days
Find the second star, I'm soaring
Then straight on to the morning
그리고 수없이 많은 감미로운 화살이 꽂힌 마음속에서 피어난 붉은 물결이 호랑의 볼 위로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호랑의 눈은 노을처럼 빨갛게 그의 목소리, 아니 무대 위 열창하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가득 차버렸다.
“와!!! 야 걔다 걔!!!”
뿔테 친구가 무대를 향해 소리쳤다.
처음 스티커 사진 속에서 웃어주던 그 빛나는 미소가 눈앞에 있었고, 싸이월드 속 그깟 질문들로는 결코 다 담지 못할 그만의 매력이 머리카락부터 운동화 끝까지 분홍빛으로 녹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호랑은 이상하게도 노래하는 그의 눈길, 미소, 목소리, 손짓 그렇게 그의 모든 게 자신만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 그때의 첫사랑은 그런 것 아닐까?
비록 자신은 이 운동장을 가득 채운 우중충한 교복들 틈바구니 중 하나일 뿐이지만, 무대 위 조명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저 주인공은 이런 나라도 알아봐 주길.
그리곤 오직 자신을 향해서 저 감미로운 목소리와 눈빛을 보내주고 있다는 설렘, 아니 그 설렘을 넘어서는 확신. 그런 분홍분홍한 마음.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세차게 꽂혀 들어오는 첫사랑, 첫 사람.
그의 노래가 계속될수록, 그렇게 그의 감미로움이 호랑을 채우면 채울수록, 호랑은 첫사랑의 강렬함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감미로운 첫사랑에 물들어 가고 있던 호랑은 몰랐다.
수많은 교복 사이를 꿰뚫고 그런 호랑을 한참이나 의미심장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호랑의 맡은 편, 그 눈길의 끝엔 지랑이 서있었다.
흥미롭다는 듯, 하지만 걱정의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