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자정이 넘은 밤늦은 시간, 지랑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호랑의 방에 들어선다. 축제의 여운이 아직 남았는지, 아니면 호랑의 방에 몰래 들어온 게 오랜만이어서인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지랑의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얘는 나랑 쌍둥이인데, 왜 항상 좋은 향기가 날까... 나는 운동화 속에서 찌든 발꼬랑내밖에 안 나는데 말이야. 쌍둥이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지랑이 호랑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향기에 취한 채 잠들어있는 호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한다.
“좋아해.. 요..”
바로 그때, 곤히 잠들어있던 호랑이 중얼거렸다.
“흐음... 생각보다 심각한가? 아까 눈빛이 예사롭지 않긴 했지만... 아니겠지 설마... 접점이 없는데 에이, 말도 안 돼.”
호랑의 잠꼬대에 지랑은 낮에 무대 위 꼬부랑 노래를 불러대던 그 썩을 놈을 바라보던 호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여자의 촉은 얼마나 무서운가,
그것도 중2 여학생의 촉은 얼마나 무서운가?
지긋이 호랑이를 내려다보던 지랑이 무심히 눈길을 거두던 찰나, 지랑의 눈에 왜인지 어둠 속에서 다른 빛을 내보이는 듯한 호랑의 책상 맨 밑 서랍장이 눈에 띄었고, 알 수 없지만, 역시나 무서운 촉 그대로 지랑은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 속에는 아주 오래돼 보이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낡은 책들이 한 무더기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단편집’... 이런 걸 보는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그게 내 동생일 줄이야. 하긴, 너는 그런 애이긴 했지. 어릴 때부터 말이야...‘
여전히 손으로는 서랍장을 조용히 뒤지면서, 잠든 호랑을 바라보며 지랑이 속삭였다.
‘이런... 쯧...’
지랑의 손에 들려있던 책 사이에서 낡은 책과 어울리지 않는 스티커사진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 사진 속에는 딱 봐도 말 안 듣게 생긴 남학생 4명이 보였다. 지극히 평범한 스티커 사진 일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진 속 3명의 남학생 얼굴엔 시뻘건 펜으로 엑스자가 쳐져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의 얼굴에는 시뻘건 펜보다 두근거리는 새빨간 빛을 띠는 색의 하트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하트 옆에는 그가 누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두 글자, “내꼬.” 가 쓰여있었다.
‘역시는 역시군.’
그 하트 속 얼굴은 바로 축제 무대 위 그 꼬부랑 노래를 불러대던 그 놈이었다.
‘호랑이 얘는 이 사진은 어디서 난거지? 이 망할 놈이랑 이미 알고 지냈던 건가? 하. 꼬인다 꼬여.’
중2의 사랑은 이런 것 아닐까.
아무리 꽁꽁 숨겼다고 생각해도, 항상 누군가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그래서 감추려 하면 할수록 더 티 나서, 결국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리는.
떨어진 스티커를 주워 사진 속을 뚫어져라 살피던 지랑의 눈에 고전 책들 밑에 깔려있는 새하얀 노트가 눈에 들어온다.
‘이건 더 수상하잖아? 여자의 촉이고 뭐고 발동할 필요도 없이 말이야.’
지랑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그 누군가처럼,
궁금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손을 뻗어 고전 책에 깔려 살려달라 소리치는 듯한 하얀색 노트를 집어 들어 펼친다.
“미쳤네.. 아냐, 미치겠군...”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