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둑-
‘언어란 건 참 무서운 것 같아.. 이렇게 큰 결심을 담아 가위질을 하는데, 싹둑, 단 두 글자로 이런 내 마음을 감출 수 있다니 말야.’
거울 앞에 선 호랑이 자신의 앞머리를 커다란 부엌 가위로 잘라내고 있다. 몇 번의 가위질로 꽤나 애지중지 길렀던 앞머리가 이마 앞에 간신히 붙어 남아있었다. 당연히 만족할 수 없다는 듯, 호랑의 손 놀림은 거침없이 옆머리로, 그다음은 길게 늘어진 자신의 뒷머리를 머리 위로 끄집어 올려 눈앞에 가져가 댄 뒤 다시 한번 가위질을 반짝인다. 싹둑이 었던 첫 가위질 소리가 어느새 썩둑으로 바뀌어버린 것 같다.
‘음... 이제 됐나? 흐음... 참, 재수 없게 생긴 게, 이지랄이랑 닮긴 닮았네. 망할 쌍둥이. 재수 없어 정말.’
목표를 달성했다는 불안한 만족의 눈길로 거울 안 자신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호랑이 중얼거린다.
호랑이 되고자 한 목표는 하나였다.
단발머리 이지랑.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쌍둥이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바꾸는 건.
세상 어떤 존재가 이럴 수 있을까?
언젠가 의학이 정말 발전해서 언젠가는 누군가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바꾸는 게 가능해지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묘한 기분이었다.
가위질 몇 번으로, 그렇게나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쌍둥이 이지랑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건.
꽤나 불안하고,
묘하고,
그러다 서글퍼지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가느다란 불안의 끝에 작지만 또렷한 행복이 반짝거리고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머리 자르게 엄마한테 5천 원만 달라고 해볼까.. 앞머리끝이 영 맘에 안 드는데...’
호랑은 반짝거리는 행복이 느껴졌음에도, 약간의 불안이 세상에 들켜 C선배가 지랑을 닮게 돼버린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아할까 봐 걱정부터 들었다.
‘에이... 엄마도 돈 없는데 뭐. 됐다 됐어.’
늘 그랬다.
엄마와 아빠는 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 회사에서 아빠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뭐라더라.. 노동조합? 노조? 뭐 그런 거를 한다고 했다.
호랑이 봤을 때 아빠는 멋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정의를 꿋꿋이 실현해 가는 그런 멋진 사람. 물론 아빠는 돈을 많이 못 벌어서 늘 자신과 지랑과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아빠, 언젠가는 돈 많이 벌 날이 올 거야. 괜찮아 나는. 그러니까 아빠도 괜찮았으면 좋겠어. 아빠는 지금으로도 충분히 멋져. 정말이야.”
그런 아빠에게 늘 호랑은 말했다.
자신의 그 말 한마디에 아빠는 활짝 웃어주었다. 호랑도 자신의 말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자신의 그 말이면 아빠의 웃음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 그거면 만족했다.
“속도 좋다 이호랑. 언젠가? 야, 아빠 엄마 흰머리 안 보여? 그 언젠가가 당장 눈앞에 와도 늦은 거 같은데?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겠우, 아빠! 그래도 내가 언니라서 얼마나 다행야? 조금만 참아봐 아빠! 내가 얼른 어른되서 아빠 엄마 그리고 저 못난이도 먹여 살려줄 테니까. 하하!!”
늘 그렇듯, 호랑의 한마디에 열 마디를 쏟아내는 이지랑. 그런 지랑의 말에도 아빠는 왜인지 웃어 보였다.
호랑의 눈에 비록 아빠는 늘 서글퍼 보이는 웃음으로만 비췄지만, 그리고 시시콜콜 자신의 말에 반대로만 하는 지랑이 정말 정말 너무 재수 없었지만, 아빠가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믿었다.
왜인지 빛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거울 앞에서 지랑의 모습이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게 맞나 하는 자책이 잠시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왼손에 들려있던 가위를 오른손으로 옮겨 잡은 호랑이 다시 한번 앞머리 한쪽을 썩뚝 잘라낸다. 한치의 망설임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손놀림이었다.
자신의 첫사랑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처럼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게 설사 웬수같은 쌍둥이, 이지랑이라도. 지랑처럼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만 남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무척 생경하고, 평소 자신답지 않고 지랑스럽다라고 느껴졌지만, 그래서 좋았다. 이상했지만, 이상하게도 지랑이처럼 되는 것, 그게 필요했다. 지금의 호랑에겐, 그 사람이 그 사랑이 필요했다.
짧아진 앞머리, 한껏 줄여진 교복 치마, 그리고 딱 붙어 당장이라도 단추가 터져나갈 것 같은 교복 상의. 그 안에 바쳐 입은 하얀색 반팔티. 가방 안에 들어있는 지랑의 파운데이션과 립밤. 주인을 잃은 호랑의 안경은 책상 서랍 구석에 처박히고, 세상을 흐릿하게 잃어버린 호랑의 눈은 분홍 빛깔이 덧 칠해진 일회용 렌즈가 차지했다.
“어휴. 이지랑 이 기지배는 이렇게 아픈걸 어떻게 하루 종일 끼고 다니는 거지? 하. 너무 아픈데...”
처음 껴보는 렌즈에 눈알이 부서질 것 만 같았지만, 그래도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학교를 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야!! 너!!!!!!”
호랑의 그 모습을 마주한 지랑이 할 말을 잃어버린다.
“너... 이게 다 무슨 꼴이야? 며칠 전에는 머리를 미친년처럼 자르질 않나, 이 교복 꼴은 뭐야? 팬티 다 보이겠다 야. 속치마라도 입던가. 하? 렌즈? 이거 내 거 아냐? 야야야. 너 뻥 안 치고 지금 눈알 튀어나오기 일보직전이야. 눈 빠개진다고. 당장 빼. 내 말 안 들려?”
잠시 말을 잃었지만, 역시 지랑답게 왜인지 결이 달라진 동생 호랑을 향해 속사포로 다그친다.
“뭐래. 나 먼저 간다.~ 아 신발 좀 빌릴게. 이 뻘건 거.”
쾅.
호랑이 현관문을 세게 쿵 닫고 나선다.
“엄마아빠가 봤으면 난리 났겠지.”
늘 등굣길 배웅을 못해주시는 엄마아빠의 빈자리가 원망스러웠는데, 이럴 때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지랑이 그런 전혀 학생답지 못한 꼴로 학교를 갈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엄마아빠라도 있었으면 말릴 수 있었을 텐데.”
처음 보는 호랑의 모습에 지랑은 서늘한 불안감이 스친다. 처음으로 자라나는 아이에게, 아니 중2병이 단단히 들어버린 부모의 빈자리는 치명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면, 그러기로 작정하면 말리기가 정말 어렵다는 걸, 그때의 지랑은 몰랐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