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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쉬운 일.

by 빨양c


“왜? 내가 어때서? 난 이러면 안 돼? 내 맘이거든?”


쉬운 일이었다.

이지랑처럼 산다는 건.

그리고 그것은 꽤나 편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첫사랑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그 첫사랑의 사랑을 따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살아보니, 처음 거울 속 짧아진 앞머리만큼이나 어색했던 자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 편안함이 익숙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캔모아에서 즐겁게 빙수와 토스트를 구워 먹었던,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지랑의 몇 마디에 바들바들 떨고 아무 소리 못하던 순진한 친구들은 다 떠내려가 버렸다. 한 순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 왜 그래? 너답지 않게. 그래, 이호랑 답지 않다고.”

친구라 믿었던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그것뿐이었다.


호랑은 비록 지랑의 외모를 그대로 따라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외모 때문에 자신이 믿었던 친구들이 자신을 이렇게 한 순간에 남겨놓고 떠 내려가버릴지 상상도 못 했다.


“응. 이제 우리는 너랑 같이 못 다니겠다. 아는 척하지 말자.”


왜?

대체 왜냐고 묻고 싶었다.

우리는 친했고, 친해왔고, 앞으로도 친할 거라고 믿었기에.

매일 그렇게 학교를 같이 가고, 급식을 같이 먹고, 시험공부도 같이 하고, 가끔은 캔모아에서 가벼운 일탈의 빙수를 나눠먹기도 하고, 노래방에 가 죽어도 잘 부를 수 없을 것 같은 티얼스 노래를 꽥꽥 부르면서, 친한 친구. 베프로 고등학교에 가도, 대학에 가도 계속 베프로 친하게 같이 지낼 거라고 믿었기에.

그래, 같이.


하지만, 같이 할 친구라고 믿었던 그 무리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는 일방적인 통보의 폭격을 얻어맞은 호랑은 “대체 왜..?” 세 글자, 아니 “왜?” 툭 하고 던질 법한 한 글자조차 묻지 못한 채, 홀로 남겨져버렸다.


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이후, 호랑은 그렇게 혼자로 남아버렸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랑의 모습으로 바꿨다는 것 만으로.

그저 자신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그 사람도 날,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만큼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는데,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자신의 세상의 전부였던 친구들이 떠내려가 버릴 줄, 그렇게 혼자가 돼버릴 줄 정말 몰랐다.


호랑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마음 한편에는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잘린 머리를 다시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친구들이 꿈꾸던 자신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머리가 길어질 시간. 다시 옛 호랑으로 돌아갈 시간.

하지만 아쉽게도, 호랑은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들은 기다려줄 시간은 없다는 듯, 아니 어쩌면 좋은 기회가 돼서 같이 놀기 싫던 자신을 끊어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친년들. 그런다고 내가 쫄 거 같냐? 같이 놀아주니까 급이 같은 줄 알았나 보지? 두고 보자고.”

이지랑이었다면 이랬을 것 같다.

아니, 분명 그랬을 거다.

‘아냐, 곱게 안 보내줬을 수도 있지. 열불이 나서 분이 풀릴 때까지 패버렸을 수도...’

호랑 자신은 바보처럼 “왜” 한 글자도 묻지 못하는데, 이지랑이었으면 분명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자 가슴 한편이 서글퍼졌다. 가슴은 서글픈데 왜인지 얼굴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아빠의 모습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예전 호랑 자신처럼 지내지도, 그렇다고 지랑처럼 되지도 못한 채,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호랑은 아는 척하지 말라는 그들의 바람대로 학교 복도에서, 급식실에서, 운동장에서 그들을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호랑답게. 하지만 피하거나 뒤돌아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가피하게 마주쳐야 할 때면 또렷이 자신의 옛 친구들을 노려봤다. 예전 호랑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지랑다웠달까. 호랑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쯔음부터였다. 그런 호랑의 주변에 새로운 친구들의 무리가 접근해 왔다.

“야, 너 이지랑 동생이지? 오늘 밤에 우리 노래방 갈 건데 같이 갈래? 크크”

한 여름인데도 새빨간 아디다스 저지를 어깨에 척 걸친 아이가 호랑에게 말했다. 딱 봐도 소위 “노는” 친구였다. 그리고 호랑은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늘 지랑의 옆옆옆에서 사진을 찍던 빨간 아디다스 애였다. 입에서 담배냄새 풍겨서 이빨을 다 빼버리고 싶다고 농담처럼 웃으며 얘기하던 지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물론 이지랑도 올 거고. 뭐, 아직 말은 안 했지만. 좋아하지 않을까? 지 동생인데. 올래? 말래? 싫음 말고. 난 두 번 안 묻는다~ 크크”

왜 얘는 입에 걸레를 문 것도 아닌데 걸레 냄새가 날까 잠깐 생각이 스쳤다.

거북했다. 하지만,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의 호랑이였다면 상종도 안 하고 피했겠지만, 지랑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싫을 리가. 그러지 뭐. 노래방만 가게?”

지극히 지랑스러운 호랑의 대답이었다.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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