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자신의 무리에 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누가 봐도 자신을 따라한 게 분명한 호랑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러다 혼자가 될 거라는 걸 지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힘이 없는 사람이 힘이 있는 사람을 따라서 시늉을 하면, 주변이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힘이 있는 척하려는 마음을 이용해 먹으려는 무리 하나.
다른 하나는 힘없는 나약함을 간파하고 무시하는 무리 하나.
그리고 어찌됐든 이 둘 사이에서 그 사람은 홀로 남게 된다. 물론 지랑은 혼자가 되지 않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힘으로 그 두 무리를 눌러버리면 된다. 그렇게 눌러서 자신을 따르게 하면 된다.
아니면 부숴버리거나.
그리고 당연히 지랑은 그런 힘을 본능적으로 갖춘 사람이었다. 타고난, 따르고 싶은 리더.
하지만 호랑은 아니었다.
호랑은 그런 힘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무리의 리더가 돼서 쾌감을 느끼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썩은 무리에 들어가 최고가 되는 것보다, 왜 그 무리에 들어가야 하는지, 그 무리에서 쾌감을 느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부터 묻는 그런 사람.
지랑이 본 호랑은 그런 아이였다.
그리고 그런 지랑의 짐작대로, 지랑의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한 호랑은 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랑 자신은 갖지 못했던, 자신처럼 살면 어쩌면 평생 갖지 못할, 정말 마음을 이해해 주는 친한 친구의 무리에서 활짝 웃던 호랑이었으나, 자신의 모습과 똑 닮아버린 호랑은 언젠가부터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 호랑을 지켜보던 지랑은 언니로서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으나, 어떻게 해주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인위적인 조작이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티가 나든 나지 않든, 당사자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걸 지랑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동안은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랑은 호랑의 언니였으니까. 그것도 단발머리까지 쏙 닮게 되어버린 쌍둥이 언니.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지랑의 무리에 섞여 들어왔다. 지랑이 손 쓴 것은 아니었다. 인위적인 조작의 두려움과 쌍둥이 언니의 고민 속에 망설이던 어느 날, 어떻게 된 일인지 호랑이 자신의 무리에 섞여 들어왔다. 지랑은 꺼림칙했지만, 홀로 남게 된 힘없는 자의 나약함을 잘 알기에, 그 당사자가 자신의 동생이었기에, 자신이 통제 가능한 무리의 울타리에 한동안 남겨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돼먹지 못한 무리에 잘못 쓸려가 개처럼 물어뜯기다 버려질 바엔 그게 나을 것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본인 스스로 이 무리와 맞지 않는 자신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공허함의 순간에 호랑을 다시 예전 호랑의 모습대로 놓아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어떤 계기로 자신의 무리에 오게 됐는지에 대한 찜찜함은 남았지만.
“여- 머리 자르니까 진짜 똑같이 생겼다 너네. 하하! 이름이 호랑이라고? 지랑이 호랑이? 재밌네 재밌어!”
지랑의 남자친구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남자친구에게 지랑은 내 동생이니 함부로 하지 말라는 강렬한 눈빛을 쏘아댄다.
“알았어 알았다구. 신기해서 그렇지. 반갑다. 이호랑. 다들 인사해~”
남자친구는 무리의 1인자인 걸 과시라도 하는 듯 호랑이를 무리에 소개한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런 호랑을 반기면서도, 왜인지 모를 어려움을 내비친다. 호랑은 여기서도 지랑의 그림자에 갇히는 것 같아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꾹 참는다. 자신은 지랑처럼 되기로 결심했고, 그러기 위해선 지랑처럼 노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랑 흉내를 내면 언젠가 c선배가 자신을 알아줄 거라는 깊은 믿음. 그리고 옛 호랑으로 돌아갈 무리도 없어졌기에, 호랑은 최대한 지랑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저 새낀 또 왜 부른 거야? 역겹게.”
새까만 어둠이 깔린 놀이터 정자에 걸터앉아 있던 지랑의 무리를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이지랑! 나 또 왔다! 반갑지? 반가운 거 다 알아~ 후후”
울프콧, 노란색 푸마 저지를 걸친, 폐급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거세게 드러내며 지랑이 자신의 남자친구를 향해 소리쳤다.
지랑은 당황스러웠다.
그 무리에는 호랑이 있었고, 호랑이 저 폐급을 위해 만들었던 망할 러브장이 머릿속에 스쳤다. 절대 저 망할 폐급과 호랑이 엮여서는 안 됐다. 자신의 무리의 울타리에서 호랑을 지키려 했건만, 예상치 못한 하이에나 한 마리가 울타리를 웃으며 넘어오고 있었다. 지랑은 황급히 호랑을 바라봤다. 지랑의 눈에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는 듯 폐급을 향해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호랑이 들어왔다.
“엥? 뭐야. 이지랑이 둘? 헐. 뭐야? 나만 이상해? 술도 안 먹었는데 이지랑이 둘???”
폐급이 소리쳤다.
그런 폐급의 반응에 이지랑의 남자친구와 아디다스 저지를 걸친 지랑의 무리 중 하나가 크게 웃는다.
“야, 진짜 똑같지 않냐? 신기하지? 근데 좀 달라. 너도 알게 될 거다 곧. 크크”
빨간 아디다스가 이때다 싶어 말을 꺼냈다.
“입 다물어 넌, 담배냄새나는 주둥이 털어버리기 전에.”
지랑의 날 선 말에 빨간 아디다스가 순간 움찔한다.
“여여. 그만. 그래도 같이 놀겠다고 온 손님인데 그럼 안되지.”
지랑의 남자친구가 왜인지 중재에 나선다.
“봐봐. 니 동생은 손님한테 관심이 많아 보이잖냐 지랑아. 안 그래?”
지랑의 남자친구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무리를 향해 말을 건넨다.
“나는 이호랑이야..”
그동안 잘만 지랑처럼 말하던 호랑이 왜인지 예전 호랑의 말투로 조심스레 폐급에게 말을 꺼낸다.
“어. 얘는 이 호랑이야. 내 동생이지. 이지랄의 동생이자 나보다 더 지랄 맞은.”
평소답지 않게 이지랑이 호랑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폐급을 향해 말한다. 동생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아. 그런 지랑의 태도에 호랑이 본능적으로 어깨로 지랑을 밀쳐내며 쏘아본다.
“이지랄. 너 잠깐 나 좀 봐.”
지랑의 얼굴을 한 호랑이 지랑의 팔을 끌며 놀이터 정자를 벗어난다.
“자, 두 자매는 저쪽에서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좀 두고... 음 그래, 너 내 옆으로 좀 와볼래 친구야?”
지랑의 남자친구가 사뭇 진지해진 목소리로 폐급을 향해 말한다. 그 목소리에 그 나이답지 않은 무거움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압도당한 폐급이 그 말대로 그의 옆으로 걸어간다.
“이 새끼. 너도 남자라고 보는 눈이 있구나. 근데, 보다시피 이지랑은 내 거야. 마이 걸프랜드. 원래 사자의 왕은 같은 사자랑 사귀지, 강아지 새끼랑은 안 사귀는 거거든.”
지랑의 남자친구가 눈을 내리깐 채 폐급에게 말한다.
“선 넘지 말라고. 이 새끼야.”
지랑의 남자친구가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살며시 들어 폐급을 쏘아본다. 그 눈에 섬뜩한 냉기가 서려있다. 그 말에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폐급은 자신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뒤걸음 질을 친다.
“지랑이 건들지 마라. 아아! 그치만, 나도 남자니까 이해는 해. 그래서 오늘 널 불렀잖냐. 쟤 이호랑인가 뭔가 보이지? 쟤는 내가 관심이 없다. 무슨 말인지 알지? 지랑이한테 선만 넘지 마. 그럼 니가 이호랑이랑 뭔 짓을 하든 난 신경 안 쓸 거니까.”
지랑의 남자친구가 아무런 감정 없이 뱉는 말에 옆옆에 있던 빨간 아디다스 저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지꺼 아니면 관심 없는 거, 하여튼 유별나다니까. 이러려고 이호랑 끌어들인거였구만? 대단해 아무튼”
빨간 아디다스 저지가 웃음끼를 머금은 채 말한다.
그 사이에 낀 폐급은 무슨 말인지 할 말을 잃은 채 눈을 내리 깐다.
“쟤네 오네. 아 물론 티는 내지 말고.”
지랑의 남자친구가 말을 마치자 쌍둥이 자매가 티격태격하며 다시 무리에게 다가선다.
그렇게 깊어가는 밤, 지랑과 남자친구, 폐급과 호랑, 그 무리의 오묘한 분위기가 놀이터의 정적을 따라 한참을 흘렀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