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집에 왔는지, 언제 침대에 누웠는지, 누가 자신을 깨웠는지 모를 어슴푸레한 새벽 호랑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언제나 그렇듯, 집은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집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호랑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본다.
평소에는 잘만 들리던 방문 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눈물범벅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 작은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온 달빛이 반사된 거울에 비친다.
그렇게 저주에 원망을 퍼부었던 얼굴이 거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분명 호랑 자신일 텐데 외모는 완벽히 지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고, 거부했던 그 얼굴이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한참을 보고 있자니, 푸르스름한 달빛이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본다.
자칫하면 떨어질 것만 같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연결된 외부 통로가 보인다. 호랑이 발걸음을 평소와 달리 뒤로 돌린다. 평소 나가던 길의 반대편 통로 끝에 옥상으로 연결된 철제 사다리가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다. 호랑이 첫 번째 계단을 향해 발을 걸친다. 바람이 불고 당장이라도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아늑하기도 하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호랑의 생각이 머릿속에 머문다. 이 말을 혹여나 자고 있는 엄마 아빠가 들었다면 속상해할 것이었다.
다른 이가 속상해할까 봐 자신의 내면에 자신을 감추는 게 자연스럽던 아이, 그게 호랑이였다.
그렇게 철제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올라 옥상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꽤나 오랜만에 올라오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힘들어할 때, 너무도 작고 작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짓눌릴 때, 지금보다 작았던 호랑은 자신보다 더 작았던 강아지를 한 품에 안고 이 철제 난간을 올랐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바람이 불었고, 그때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물론 그때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슬퍼할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때 생각이 나니, 지금은 하늘나라로 돌아간 강아지 생각이 문득 들어 하늘 위를 올려다본다.
달이다.
작고 작은 자신과는 비교도 안될 크고 커다란 달이 옥상 위 서있는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악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듯이, 거대한 달이 자신을 집어삼킬 듯 머리 위에 주황빛을 내며 떠있었다.
슬퍼 보였다.
슬픔이었다.
늘 그랬다.
이 옥상에 올라 저 달을 보면, 늘 저 달은 청승맞게 주황빛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길을 잃은 달빛이었는지, 호랑의 흐릿해진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방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도 그런 밤이었다. 무력한 밤. 어린 시절 같은 곳에 서있던 그때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이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은 밤.
“그래도 이번엔 정말...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눈물이 터져 나온다.
거울에 비췄던 지랑의 모습을 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 자신을 지워서라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자신도 지랑처럼 당당하게 살면, 그러면 그 사랑이 자신을 바라봐줄 줄 알았다. 저 위에 있는 저 달처럼, 자신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던 누군가에게도,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또 확신했다.
눈꺼풀이 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꺼풀이 눈동자를 가리면, 그 찰나의 순간에 꾹꾹 눈 안에 숨겨놨던 눈물이 끝도 없이 새어 나온다. 아무리 틀어잠구려고 해도, 잠가지지 않는 눈물이 있다.
바보처럼 아무 소리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무력하게 자신의 눈꺼풀이랑 싸워야 하는 바보 같은 존재가 뙤어버린 자신이 밉고 또 미워진다.
더 미운건, 이렇게 스스로를 미워하는 자신을 누군가 알아주고, 안아주고, 다독여주길 바라면서도, 이런 미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켜 걱정을 끼칠까 봐 걱정부터 앞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걱정을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는 듯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손이 끝도 없이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닦아준다.
무력한 호랑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까만 하늘 구멍단 커다란 달만 올려다볼 뿐이다.
바람이 분다.
늘 그랬다.
하늘도,
달도,
바람도,
엄마도,
아빠도,
지랑이도.
그리고..
호랑이 자신도,
늘 자신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간다.
호랑은 그게 싫었다.
아니 그런 자신이 싫었다.
커다란 달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아까 있었던 일이 달 안에 펼쳐진다.
아무도 없던 저 노란 달 안에 첫사랑이 나타났다.
분명 첫사랑보다 호랑이 먼저 와있었는데, 호랑은 그런 첫사랑의 등장에 황급히 주변 나무 풀 숲으로 숨어버렸다.
숨어서 숨을 고르고,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인사를 할 수 있을까, 혹시 자신을 보자마자 고백을 해버리면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까, 어떻게 근사하게 좋다고, 고맙다고, 그렇게 자신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줘야 할지를 아주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지랑이 모습을 나타냈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분명 자신이 서있어야 할 자리였는데, 갑자기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지랑이 서서 자신의 첫사랑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다면 호랑은 몹시 불안했을 것이었다. 미니홈피에서 첫사랑이 지랑에 대한 마음을 본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랑은 왜인지 호랑 자신의 첫사랑을 싫어했다. 지랑의 남자친구보다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노래까지 잘하는 자신의 첫사랑이 부러워서 이리라. 그리고 그래서 호랑은 안도했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지랑과의 경쟁에서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날 선 둘의 대화를 들으며 호랑은 자못 안심했고, 또 아주 듣기가 좋았다. 서로 싸울수록 호랑 자신이 첫사랑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 같은 묘한 희열을 느꼈다.
“어. 너 좋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고.
난 내가 원하는 거 갖고 말거든. 나랑 사귀자. 그놈 버리고.”
한순간이었다.
분명 호랑이 생각하는 대화가, 그 흐름이 아니었다. 어디부터 잘못됐는지 알 길도 없이, 갑자기 자신의 첫사랑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저 나오기 전 러브장을 끌어안고 설레던 가슴이, 그 가슴으로 보이던 주변에 알록달록 분홍 말랑한 세상이, 첫사랑의 한마디에 무채색 흑백 세상에 갇혀버렸다.
달에 비친 그때의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주황빛이었는데, 그때의 생각이 달빛에 비치자 물이 다 말라비틀어져버려 쩍쩍 갈라진 달의 표면처럼 무채색의 기억이 되어있었다.
그 이후에 대화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느 순간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지랑의 남자친구가 나타났고, 자신의 전부를 산산조각 때려 부수고 있었다. 당장 말려야 하는데, 그만하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호랑의 몸은 굳어버렸다. 영리한 호랑은 순간적으로 뒤편에서 모른척하고 있는 지랑에게 소리 질러 저 세상을 부수는 무식한 니 남친을 뜯어말리라고 소리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랑의 몸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호랑은 무서웠다.
저 파괴자의 앞을 막아섰다가 자신도 부서질까 무서웠고, 그렇게 자신의 전부인 첫사랑이 산산조각 나는 게 무서웠다.
저 파괴자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이지랑,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는 이지랑뿐이라는 사실이 무서웠고, 무기력해져버렸다.
“이지랑이라면 어떻게 할까.”
왜 그때 이 말이 머릿속에 스쳤는지 모르겠다.
늘 자신을 괴롭히는 이 문장이 그때 딱 떠올랐고, 그 물음에 우습게도 몸이 바로 반응해 파괴자와 호랑의 세상의 전부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 때려...”
그만하라고, 제발 자신의 전부를 그만 부수라고. 제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그만 부수라고 파괴자를 향해 소리쳤다. 분명 호랑의 생각에는 큰 소리로 발악하며 질렀는데, 왜인지 파괴자는 전혀 놀라지 않았고, 가소롭다는 눈빛을 흘겨보내고 있었다.
“이지랑이라면... 이지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이에 서있던 호랑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계속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은, 물음의 주인공인 지랑이 했다.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호랑 자신과 파괴자 사이에 우뚝 서 양팔을 길게 뻗은 지랑이 호랑 자신과, 호랑 자신의 전부를 파괴자로부터 지켜내고 있었다.
“그래.. 지랑이라면 이렇게 하겠지.”
머릿속 물음을 던지던 존재는 만족한다는 듯 더 이상 호랑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무서웠던 파괴자가 지랑의 그림자에 감추고 나니 호랑의 무서움은 사라지고, 지랑에 대한 증오만 남았다. 파괴자 앞에서는 아무 소리 하지 못하던 호랑은 지랑을 향해 발악의 소리를 질러댔다. 제발 자신의 세상에서 꺼져달라고. 제발 자신을 좀 놔달라고. 제발 호랑 자신을, 호랑으로 남겨달라고.
거친 무채색으로 변해있던 달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주황빛으로 가득 차오른다.
가득 차오르는 게 넘쳤는지 또 주황빛을 뚝뚝 떨어뜨린다.
어찌나 무겁게 떨어지던지, 하늘에 걸려있던 커다란 달이 휘청거리는 것만 같다.
호랑의 두 손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동으로 호랑의 볼 위를 훔치고 훔친다.
주홍빛 물방울이 끝도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