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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발…

by 빨양c




꿩 대신 닭이었다.

굳이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하늘을 날 수 있는 꿩은

지랑이었고,

새벽마다 시끄럽게 울어대기만 하는 닭은

호랑 자신이었다.


자신의 전부였던, 자신의 세상이었던 첫사랑은 자신을 꿩 대신 닭.

그렇게 불렀다.

상처였다.

너무도 흔한 말이었던 꿩 대신 닭이 이렇게나 슬픈 말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말이 한 사람의 심장을 갈갈이 부숴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근데 더 비참한 건,

슬퍼도,

그래도 닭이라도 돼서,

그의 세상에 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비참.

그래, 그 단어의 무게만큼 슬프고 처참한

비참이었다.


그 나이 때는 원래 그래.

어린 이성을 서툰 감성이 지배하던 때.

그럼에도 자신을 좋아해 준다면 그런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괜찮다고 호랑은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넌 이호랑인거야.”

그때 머릿속 누군가가 비웃듯 말을 내뱉었다.

그날 이후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호랑을 향해 누군가가, 무언가가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호랑의 앞머리가 많이 자랐다.

예전 같았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앞머리를 자르고, 또 잘라서 지랑의 그것과 길이를 똑같이 맞추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주황 달빛에 잔뜩 물들었어서인지, 두 손은 다시 가위질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첫사랑은 병원에 한동안 입원해 있었다고 했다.

호랑은 몇 번이나 그 병원 로비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가 몇 층에 있는지, 병실은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홀로 선 중2의 호랑에게 거대한 병원은 너무나 크고, 너무나 혼잡하고, 너무나 무서운 곳이었다.

다 깨부숴진 자신의 전부가 그곳 어딘가에 있는데, 자신은 자신의 세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꼭 전부를 찾아, 자신이 전부를 생각하며 차곡차곡 그려온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담긴, 자신의 전부인 마음을 담은 작은 러브장이나마 전해주고 싶었다. 그 러브장을 첫사랑에게 건네주면, 그 첫사랑은 자신을 보고 웃어주고, 그렇게 세상은 다시 분홍말랑해지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이 그저 기분 나쁜 악몽이었다고 자신을 다독여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세상을 찾으러 가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어느새 길어진 앞머리가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앞머리만 좀 길어도 지랑과는 많이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러브장을 펼쳐두었고, 어째서인지 왼손은 러브장 마지막장에 있던 분홍 하트에 검은색 테두리를 짙게 칠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때 귀에 파헬벨의 캐논 연주가 들렸다.

언제 켜놓은지 모를 미니홈피에 배경음악이 돌고 돌아, 언제 설정해 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BGM을 자동으로 틀고 있었다. 오래전 노래인데도 이상하게 그날따라 귀에 연주가 맴돌았고, 그렇게 잠시 호랑의 시선이 미니홈피를 향했다.

일촌평이 없어져있었다.

호랑이 눈을 깜빡여 다시 화면을 응시한다. 없다.

자신의 첫사랑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겼던 일촌평이 사라져 있었다.

“안돼…”

머릿속 누군가가 또다시 호랑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안돼! 믿을 수 없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호랑의 왼손은 검정 하트를 빗겨나가 날 선 줄을 그어놓은 채,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일촌 친구 목록을 펼친다.


없다.

첫사랑이 없다.

자신의 전부였던, 자신의 세상이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안돼. 믿을 수 없어. 어떻게든 해야 돼.. “


“지랑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하지?“


“제발…”


머릿속에 분명 하나의 목소리였는데 순식간에 다섯 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지랑이라면 그러고 있지 않을걸?’

바로 그때, 회색빛 목소리들 사이로 하나의 주홍빛 선명한 목소리가 호랑의 눈에서 반짝거렸다. 호랑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검은색 하트로 박살이 나있는 러브장의 마지막장을 덮고, 거칠게 한 손으로 집어든 채

자신이 믿었던 세상의 전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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