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호랑의 앞머리는 꽤 자라 이제 귀 뒤로 넘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뒷머리도 예전 그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꽤나 자라 가볍게 묶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껏 줄였던 교복이 꼴도 보기 싫어 다시 사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 세상이.. 다 부서졌음에도, 가난은 여전히 자신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대로. 세상이 깨져도 가난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호랑은 그저 마음속에 꾹 눌렀다.
말해도 바뀔 건 없었다.
“괜찮냐? 걔 자퇴했다더라. 뭐 가수 된대나? 별꼴이지 참.”
어느 날 지랑이 호랑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꺼냈다. 지랑은 늘 그런 식이었다. 상대방이 불편해할 걸 알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마는. 호랑은 그게 싫었다. 자신은 그러지 못했고, 그렇게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거란 걸 호랑은 알고 있어서 더 그랬다.
“괜찮은 거 맞아 동생? 이 언니한테 다 말해...”
“꺼져.”
낮은 두 글자가 호랑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 한 숨결에 눈치를 보던 지랑이 서둘러 자신의 말을 주워 담는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이후에도 지랑은 종종 폐급, 그 C선배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처음에는 그 말에 호랑은 여전히 흔들렸다. 좋아했던, 세상의 전부였던 존재를 포기하는 건, 잊어내는 건 감히 그 나이의 호랑에게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너무 힘들면,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도 괜찮아. “
머릿속 누군가가 호랑에게 말했다. 호랑은 힘들었지만 그 말이 좋았다. 위로가 되었다. 지금 당장 없던 일로 잊어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저 말로 어느 정도 타협을 하는 것도 마음 한쪽이 조금은 가벼워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꺼져라.”
하지만 차가운 호랑의 반응에 그만할 법한데도, 지랑은 꽤나 오랫동안 호랑에게 말을 건넸다. 두 글자로 끝났던 지랑을 향한 호랑의 마음이 세 글자로 늘어났고, 그렇게 조금은 새까맣게 타버렸던 마음이 조금씩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았다.
호랑은 자신의 세상을 무참히 부숴버렸던 파괴자, 지랑의 남친과 계속 사귀는 지랑이 이해가 안 됐다. 지랑이 맨날 하는 말대로 호랑 자신을 그렇게 소중한 동생으로 여긴다면, 그 소중한 동생의 세상을 산산조각 낸 파괴자랑 만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괜한 원망이 들었다.
“그래야 공평한 거 아냐?”
머릿속 누군가가 말했다.
처음에는 하나의 목소리였던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한 40개의 목소리로 늘어나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불편했고, 복잡했고, 번잡해서 지우개를 만들어 머릿속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머리가 길어져서인지, 언젠가부터 그냥 떠들어라 하는 마음으로 내버려 두었다.
호랑의 머릿속에서 자기들끼리 떠들기도 하고, 호랑 자신에게 물어오기도 했지만, 호랑은 스스로가 내킬 때만 대답해 줬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지랑의 일에 대해서는 일치 단결해서 호랑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그 목소리들이 가끔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 그때 만들었던 그 책 있잖아? 그 러브장. 유치하긴 했지만, 제법 멋진 말도 있더라. 그런 건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물론 지랑이 러브장 이야기를 꺼낼 때면 호랑의 말랑해지던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새까맣고 딱딱하게 굳어지기도 했다.
“내가 썼는데.”
딱딱해진 마음 덕분인지 지랑의 기가 찬 물음에 호랑은 당당히 대꾸하기도 했다.
“그래? 그건 나랑 다르네. 난 책이라면 질색인데, 넌 글을 잘 쓰네. 재능? 뭐 그런 건가? 나랑 왜 다르지?”
지랑도 물론 지지 않고 호랑에게 답했다. 그리고 당연히 호랑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지랑이 하는 말 중 10에 9는 다 쓸데없는 말이라 호랑은 생각했다.
지랑이 러브장을 말한 날이면, 그날 찢겨 밟힌 종이 조각들을 굳이 다시 꺼내어 묻는 머릿속 목소리가 있었지만, 호랑은 그럴 때면 옥상에 올라가 커다란 달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노트를 꺼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글로 적어보기도 했다.
종이 한 장, 두장, 열 장, 머릿속에 떠들어 대는 목소리들의 말을 종이에 가볍게 펼쳐내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고, 그렇게만 해도 머리가 한 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지랑이 말한 대로 이런 게 재능일지 모르겠다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대감아 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생각이 바로 그 기대를 죽- 그어 없애버렸다.
이런 종이 쪼가리, 글자들은 아무런 의미도 되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무작정 현관 밖으로 나가 집 근처 커다란 나무에 기대 그 목소리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기도 했다.
그 나무는 호랑이 어릴 때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는데, 머리가 길어서인지, 마음이 딱딱해져서인지 어느 날부터 눈에 띄었다.
그리고 머릿속 목소리들에 짓눌러 힘이 들 때 이따금씩 그곳에 앉아 주저리주저리 대화를 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머릿속 목소리들과 대화를 한 건지, 나무와 대화를 한 건지, 자기 자신과 한 건지 호랑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그 나무는 이상하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