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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구질구질.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by 빨양c




‘나 이호랑이야.’


‘기다릴게’


‘나올 때까지.’


‘춥다.’


‘전화 좀 받아.’


‘잠깐만 만났으면 해..’


새까만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

빛을 잃어가는 주황빛 가로등이 딱 하나 켜있는 골목길 담벼락에 호랑이 기대 힘없이 주저앉아있다. 낡디 낡은 핸드폰 자판을 두드려 전송을 누르고 누른다.


‘보고싶...’


꾹꾹 눌러 단어들을 화면에 어렵게 띄우던 호랑의 손가락이 한참을 머뭇거린다.

C선배의 집 앞.


아직 불이 켜있는 창문을 보아 C선배는 아직 잠들지 않은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뚫어져라 보고 또 봐도, 창문의 불빛은 미동도 없다. 호랑의 텅 빈 시선이 창에서 눈길을 거둬, 하늘 위 달을 쫓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꼭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존재는 곁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갈 곳 잃은 호랑의 시야에 오른쪽 옆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러브장에 머문다. 분명 자신의 마음이 가득 담긴 자신의 러브장이라 믿었는데, 낯설기만 한 러브장이 되어 주인을 잃고 자신과 같이 텅 빈 채로 놓여있었다.


“철컥”

바로 그때, 호랑이 기댄 담벼락 오른쪽 끝에 있던 초록 대문이 열렸다.


“계약서 어머님께 잘 전해드리고, 저번처럼 크게 다치면 안 돼. 몸조심! 사고 치지 말고! 특히 목소리를 아껴. 자 그럼 가보도록 하지. 참! 출국일 정해지면 알려줄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니 준비 잘하고 있으라고. ”

낯선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네. 사장님. 걱정 마세요. 목소리도 관리 잘해놓을게요. 헤헤! “


C선배의 목소리다.

호랑이 그렇게 닿고 싶었던 세상의 전부였던 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리고 있었다. 중년 남성이 검은색 고급 세단을 타고 좁디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차를 향해 90도 인사를 하던 C선배가 허리를 편다.


“아야.. 어휴.. 젠장할.. 이놈의 갈비뼈는 낫질 않네.. 퉤”

C선배가 배를 움켜쥔 채 호랑이 기댔던 담벼락에 기대어 거칠게 침을 뱉는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그의 눈앞에 호랑이 서있다. 호랑의 손에는 작지만 두툼한 책이 들려있었다.


“괜찮아? 아직도 안 나은 거야? 좀 봐봐.”

호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C선배를 향해 팔을 뻗는다.


“뭐야 이건 또. 이호랑? 퉤. 이지랄인 줄 알고 잠깐 설렜네. 이지랄이든 이호랑이든 지겹다 지겨워. 꺼져. 여긴 왜 온 거야?”


“... 문자 못 봤어? 내가 계속 연락했는데..”


“어휴. 미저리 같은 년. 내가 받아야 되냐? 받아야 돼? 넌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구질구질.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혼자 멋대로 결정하고. 상대방이 하는 얘기 좀 들어라 좀. 그날 그렇게 개 털리고도 또 날 찾아와? 그냥 이름 바꿔라 야. 이호랑 말고 이구질로. 아니 구역질이 낫겠네. 퉤.”


C선배가 다시 한번 침을 뱉는다.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호랑은 따져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머릿속에서 그렇게 울렸다. 하지만 왜인지 호랑의 입술은 꿈쩍하지 못하고 파르르 떨고만 있다.


“이거... ”

호랑의 손에 들려있던 러브장이 진짜 주인이라 믿었던 존재를 향해 보내진다.


“이게 내 거라고? 난 처음 보는 건데? 뭐냐 이건 또.? 헐? 헐!! 헐??? 킥킥킥. 야. 이거 뭔데? 니가 만든 거냐? 정성 오지네. 근데 어쩌냐. 이게 내 거일 리가 없잖아. 니 멋대로 상상하고, 꿈꾸고, 덕지덕지 니 맘대로 만들어진 이딴 게. 감히 내 거라고? 진절머리 난다. 구역질 난다고! “


C선배의 말에 호랑의 어깨가 들썩인다.


‘이럴 줄 몰랐어?’

머릿속 누군가가 호랑에게 말을 건넸다.


‘너 구질구질한 거. 몰랐어?’

다른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또 말을 건넸다.


‘이구질. 호랑이란 이름보다 훨씬 너한테 잘 어울린다. “

세 번째 목소리도 질세라 한마디 거든다.


호랑은 그 목소리들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다. 어깨에서 시작된 떨림이 목에서 울컥하고 한번 올라오더니, 그다음 입술로, 그다음 볼 위 눈밑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만 갖고 꺼지세요. 이구질씨. 아냐, 이렇게 해도 넌 안 꺼지겠지. 아휴. 그래. 내가 도와줄게. 잘 봐. “


C선배가 호랑이 건넨 러브장을 호랑의 얼굴을 향해 강하고 빠르게 내려친다. 호랑이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는다. 골목길에 새까만 정적이 휩싸인다.

퍽, 소리가 이어질 것 같았는데, 아무 소리가 나질 않자 호랑이 떨리는 눈을 살며시 뜬다. 눈앞에 자신의 세상인 러브장이 활짝 펼쳐져있다.


“오늘부터 나랑 1일 하는 거다.”

눈앞에 하얀 종이 위에 분홍빛깔 찬란한 문장이 펼쳐진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쫙-

퍽인 줄 알았는데,

쫙- 소리가 이어졌다.


”넌 맞는 것보다 찢기는 게 더 어울리거든. “


쫙 쫙 쫙.

호랑의 전부가 담겼던 세상이 호랑의 눈앞에서 갈가리 찢겨나가기 시작한다.

찢기는 사이사이로 자신의 전부였던 존재의 교활한 웃음이 호랑의 눈에 선명하게 날아와 박힌다.

그 웃음에는 분명 어떤 소리가 있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호랑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회색빛의 웃음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회색 잿빛이 주황으로 빛나던 호랑의 눈을 찌르고 찔러, 점점 붉게 만들더니, 기어코 어깨에서 시작된 떨림을 물방울로 빚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소중한 존재로부터 찢긴 자신의 세상이 눈앞에서 암담하고 화려하게 휘날리고 있었고, 사이사이로 계속해서 회색 잿빛의 쓴웃음들이 호랑에게 날아와 박히고, 셀 수 없이 박히고 있었다.


그렇게 호랑에겐 영원 같은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C선배가 손에 쥐고 있던 러브장에 두툼한 표지를 호랑의 발언저리를 향해 가볍게 내던진다.


”됐지? 어휴. 찢어버리는데도 오래도 걸리네.

이제 진짜 꺼져주라. 아니다, 그냥 내가 꺼질게. 끝! 간다! 퉤. “


쾅.

초록빛이라 믿었던 검은색 문이 닫혔다.

빛을 잃던 주황 가로등 불빛이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했다는 듯이 심하게 깜빡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잠깐씩 비추는 호랑의 얼굴에 주황 물방울로 범벅이 되어있다. 이번에는 왜인지 양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바닥으로, 끝도 없는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눈물의 끝자락에는 찢겨 짓밟힌 호랑의 세상이 담겼던 종이조각들이 있었다. 감히 두 번 다시 꿈꿀 수 없을 것 같은 비명으로 변해버린 세상이었다.


‘이지랑이라면 어땠을까?’

정적뿐인 새까만 세상. 새빨간 질문을 품은 목소리가 호랑의 머릿속에서 심장으로 일순간에 내리 꽂혔다.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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