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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양c May 19. 2022

Ep16-2. 전화 오면 나 없다 해

꿀만 취하고 독은 버리고 싶다



"그럼 정식 클레임을 진행하세요. 저한테 이러지 마시고."


여기서 수출회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뭐가 있을까?

딱히 없다. 그저 하란데로 할 수밖에.. 그렇게 클레임을 신청하고 다시 네 번째 달, 여섯 달,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이쯤 되면 우리는 모두 알 수 있다.

그 화물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


결국 6개월 이상의 시간을 보내고 항공사에서 분실 화물로 최종 확인을 받아 클레임 보상이 승인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보상액은 신청한 것보다 훨씬 적은, 정.말.말.도.안.되.는. 금액이 책정된다.

항공사는 말한다.

"이거라도 받으시는게 그래도 낫지 않으시겠어요?"

물론 여전히 무심하고 그래서 어이없게도 그 감정 없는 말투가 친절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그 내용은?

사악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계속해서 항공사로부터 화물 운송을 위한 스페이스를 받아야 하는, 즉 거래를 이어 가야만 하는 수출회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깊은 빡침을 느끼지만 쿨한 비즈니스 웃음으로 꽁꽁 감춰야 한다.

그래, 그 잘난 성숙한 비즈니스맨은 바로 이것을 해낼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오 차장은 말했었더랬다.


나이스한 거절과 티나지 않는 쿨한 비즈니스 웃음.


내가 꿈꾸는 내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먼 짓거리를 이 사회, 이 조직은 강요한다.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었을 때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우리의 망할 설 팀장은 말했었다.

 "안됐네.. 근데 우리가 해줄수 있는 건 다 해줬잖아.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고, 아 그리고

전화 오면 나 없다 해.

신입시절 이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아인은, 이게 정말 내가 그렇게 간절히 꿈꾸던 회사이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인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10년, 20년 후 저 자리에 내가 앉는다면,

그래서 나도 저따위 말을 지껄이고 있다면,

그것만큼 처참한 직장생활이 또 있을까?

그것만큼 한없이 부끄러운 어른이 되어 있으면 어쩌나.


시간이 흐른다. 위 사례와 비슷한 화물 분실 상황에 직면한 영업직 담당자가 된 아인은 그 신입의 시절을 기억하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그리고 화물 분실로 깊은 빡침을 머금었을 그 수출회사 건물 입구에 선다.

마음이 무겁다.

항공사가, 내가 일부러 저지른 죄도 아니고, 해외지사에서 잃어버린 걸 왜 내가 사과하러 와야하는지. 솔직히 억울하고, 도망가고 싶고, 신입시절 봤던 그때 그 설 팀장처럼 나 없다고 하고 숨어버리고 싶다. 꿀만 취하고 독은 버리고 싶다. 인간은 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이겨버렸다. 나는 결코 저렇게 나이 들고 싶지 않다.

내가 그렇게 꿈꿔왔던 직업이고, 내 업무였으니까.

몇 안 되는 꿈을 좇는 사람은 그런 거 같다.

그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이상한 성실함과 망할 책임감.


아인은 힘을 낸다.

나는 개인자격으로 온 게 아니고, 회사를 대표하는 영업 담당자로서 왔으니 사과할 건 사과하고, 다른 사업 진행할 건 또 제안하고, 그렇게 당당하자고 수십 번 다짐한다. 무한 한숨도 쏟아진다. 막상 문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온다.

문이 열리고, 아인 입장.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수출회사 담당자와의 미팅 시작.

그리고 그의 첫마디가 아인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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