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륫힌료르 Nov 05. 2019

삶도 죽음도 그의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를 읽고


e-book에 푹 빠져있는 요즘, 서점 사이트를 뒤적이다가 눈에 띄는 책 제목을 발견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니. '어떻게 살 것인가(유시민)'라는 책이 있음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죽는 방법에 대해 다룬 책이 있다는 건 또 처음 알았다.


얼마 전 시청한 말기 암환자들의 다큐멘터리 ㅡ KBS '앎', 그리고 갑작스런 가족의 투병 소식. 안 그래도 삶과 죽음의 경계란 대체 뭘까 생각하게 되는 요즘,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과 시야를 선물 받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인도 출신 의사 아툴 가완디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면서 겪은 것들을 집필한 책이다. 그는 늙어간다는 게 뭔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죽음에 빗대었을 때 지금, 바로,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ㅡ 우리 모두는 언젠간 늙어 죽을 것이며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는 것 ㅡ 도 함께.


[1] 늙어간다는 것

7년 전 네덜란드 교환학생 시절 룸메이트였던 스웨덴인 조안나와 나이듦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21살 치곤 좀 무거운 주제였던 듯하지만, 그때도 나이듦과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젊음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막연히 두려웠다. 그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나이 먹는 걸 싫어해? 스웨덴인은 나이드는 걸 지혜로워지는 거라고 보는데."

당시에는 돈 많은 선진국의 여유로운 마인드가 그저 부러웠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 부러움의 구체적인 대상은 바로 잘 갖춰진 복지와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순간 6년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느낀 막연한 두려움의 정체가 흐릿하게나마 드러났다.




외할아버지는 내 기억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늙어가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뭔지 보여주신 분이다. 명절마다 외가에 방문하면 내게 그림을 잘 그린다며 그렇게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할아버지 역시 손재주가 좋으셔서, 집에 갈 땐 직접 새끼 꼬아 만든 소쿠리와 농사 지으신 농작물을 우리에게 쥐어보내셨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어느 순간부터 귀가 점점 멀어버리셨다. 한밤중에 주무시다 깨서 돌아다니시는 일이 잦아졌으며, 치매 증상이 시작됐고 성격이 신경질적으로 변해가셨다. 그러다 어느 겨울, 넘어져서 고관절을 다치신 이후 병원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셨다.


나는 그때까지도 잘 몰랐다. 어르신들에게 넘어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외할아버지는 1년 가까이 온갖 합병증에 시달리시다가 내가 네덜란드에서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렇게 외할아버지를 보면서 처음으로 늙는 게 뭔지 경험했다. 어제까지도 당연하던 일상이 서서히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 혼자 힘으로도 거뜬하던 일이 다른 이의 도움 없인 불가능해지는 것, 내 활동반경이 점차 좁아지는 것... 늙어간다는 건 그런 거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젊음이 충만한 지금도 늙는 게 두려웠나 보다.


조안나의 조국이 부러웠던 이유는 거기 있었다. 그곳엔 늙더라도 그 '늙음'을 자연스레 케어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니까. 덕분에 그 나라 사람들은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덜할 테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으니 일상에서 마주하는 '늙은이'들이 남 같지 않았다. 이전보다 그들이 시야에 더 잘 들어왔다.


며칠 전 수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서성이고 계신 한 할아버지를 봤다. 지팡이를 짚고 매우 느린 걸음으로 힘겹게 버스에 올라타신 할아버지. 기사님은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어르신! 꼭 바로 집에 들어가셔야 합니다!"라며 소리치셨다. 풀린 눈으로 힘없이 돌아다니는 할아버지가 걱정되어 하신 말씀 같았다. 한 정류장도 걷기 힘들어 버스를 타신 할아버지를 보며 머지 않아 마주할 부모님의 늙은 모습이 겹쳐보였다. 버스 기사님도 그 어르신이 본인의 부모 같아서 그토록 걱정 섞인 말씀을 하신 겠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늙고, 내 가족과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좀 더 편하게 잘 늙을 수는 없나? 지금 갖춰진 시스템으로 모두가 잘 늙을 수 있을까? 병 자체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지만 '늙음'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서도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오만가지 의문들을 품게 했다.


[2]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저자는 자신이 만난 환자들이 생의 마지막을 겪는 과정,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투병 과정을 통해 '죽음'이라는 일련의 사건을 현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끝을 알면서 시작한 삶이지만, 눈앞에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인 죽음의 장면들이 그려지니 불편했다. 피하고 싶었다. 내가 죽는 건 상상도 안 되고, 나의 부모님이 죽는 건 더더욱 생각하기 싫었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모두가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언젠간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고. 인간이 삶의 유한함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며, 존엄한 생의 마무리를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 배려는 단지 의료적인 측면에 그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1년을 보면서, 나는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당연히 요양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는 건줄 알았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집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는데, 그 사실을 접하고도 의료장비가 갖춰진 병원이 외할아버지에겐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보통사람들의 바로 이런 생각들을 지적한다.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모든 이가 그저 안전하기만을 바라는 건 아니라면서. 그는 죽음을 앞둔 이들 또한 건강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삶의 영역을 지키고 싶어하며, 삶의 주도권을 마지막까지 놓고 싶지 않아 한다고 설명한다. 죽음에 대해 우리가 여태 피하고 깊게 고민하지 않은 결과 많은 이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만 받다가 병원에서 사망한다고 말이다.


의사인 저자는 의료행위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케어를 검토하는 등의 일이 절대 환자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엄한 마지막을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용기있게 고백하고 있었다.


다시 외할아버지가 떠올랐다. 1년 동안 외출도, 귀가도 하지 못한 채 욕창이 생겨가며 누워만 계셨던 나의 외할아버지. 목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꽂고, 호스를 통해 가래를 빼내고, 팔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지내시면서 과연 살아있음에 행복하셨을까?


당시 내 어머니와 외삼촌, 이모들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결과는 좀 다르지 않았을까. 우리 모두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이의 마음에 대해 무지했던 게 아닐지. 어쩌면 입원하지 않고 가족 품에서 오롯이 마지막 일주일을 살다 간 우리 강아지 또또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특히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이 있다. 저자의 인터뷰이 '수전'이 완화치료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 나눈 대화다.


"아버지,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아버지가 생명유지를 위해 얼만큼 버텨낼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상태면 사는 게 괴롭지 않을지 알아야만 해요."

"글쎄,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식축구 중계를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살고 싶구나. 그럴 수만 있다면 통증이 좀 심하더라도 이겨 낼 자신이 있어."

- 본문 중에서 -


수전은 대화 후 수술 등의 의료행위를 선택할 때 수술 후 아버지가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미식축구를 볼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을 두고 결정했고, 후회는 없다고 했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 한 마디로 그녀의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한 셈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대화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임종을 앞둔 이가 가진 삶의 우선순위를 파악하고, 그럼으로써 그가 주체적인 삶을 놓지 않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기에. 그래서 아직은 한참 먼 얘기였으면 싶은 내 부모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도 가장 먼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리라고 다짐했다. 삶이 그들의 것이었다면 죽음도 그들의 것이어야 하니까. (그들이 설령 인공호흡기를 떼어달라 한다고 해도 이는 안락사 논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 생각한다. 저자 역시 인위적 안락사에 의존할 가능성에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살고 죽는 것을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으로만 여겼던, 죽는 이의 마음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일찍이 이 책을 읽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서술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깨달음을 준다. 카스텐슨 교수 연구 팀에 따르면 인간의 우선순위는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에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나이가 어리더라도 머지 않아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우선순위와 관점은 노인의 그것과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임종이 가까워오면 '현재' 그리고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젊고 건강할 땐 사회적 관계망을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시간이 촉박해지면 우선순위가 바뀐다고 한다.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카스텐튼 교수 연구 팀의 이러한 가설에 깊이 공감한다. 젊음이 충만한 지금의 나는 래를 위해 심히 저축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잠시나마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뒤 무사히 살았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아서 내 가족과 내 사람들을 여전히 볼 수 있음에 감사해졌다. KBS 다큐 '앎'에 출연한 말기 암환자들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가족들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으로 살면서 우선순위는 계속해서 변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실존는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나에겐 무엇보다 내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돈 없이 살았음을 후회하지는 않을 테지만, 내 사람들에게 못하고 살았다는 후회를 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게 가장 우선하는 게 뭔지 늘 생각하고 잊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그 옛날 눈물 펑펑 흘리며 읽었던 동화 '가시고기' 속 한 구절내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한 내일이다 ㅡ 을 명심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 것이다. 인생의 파노라마를 보게 되는 그날, 웃으며 눈 감을 수 있도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