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다

by 노수연

나는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정’과 ‘친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이런 주제에 대해 글을 써 보고 싶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유튜브에서 사피엔스 스튜디오 채널의 ‘다정은 체력이고 배려는 지능이라던데.. 필요한 다정 VS 피곤한 다정’, ‘다정’ 단어 하나로 펼치는 수다 한 판’(적수다)이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고 꼭 다정에 대해서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이 영상의 후기 같은 느낌이다.



나는 다정한 사람인가?

최근 들어 다정한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과연 나는 다정한 사람일까? 다정하다의 국어사전의 정의는 ‘정이 많다. 정분이 두텁다'이다.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인 것 같긴 하다. 괜히 누구를 챙겨주고 싶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사람이 아니라고 내팽개치는 것도 싫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정을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학회장과 동아리 부회장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뒤에도 나오겠지만 다정은 체력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릇이 작아서 그런지, 체력이 약해서 그런지, 바빠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중요한 사람들에게 다정하지 못하다. 나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만 다정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정하지 못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부모님(현재 자취 중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한 달에 몇 번 밖에 보지 못한다.), 중학교 때 친구들, 레슨 선생님 등이 있다. 현재 보이는 사람들(학교 사람들)에게 다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그런 핑계로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연락을 할 용기를 내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앞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정해지기를 바란다. 노력할 것이다.



뜻밖의 다정함

이 영상에서 선우정아가 비행기에서 맞이한 뜻밖의 다정함을 이야기하며 따뜻한 온수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어쩜 다정을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이런 온수가 밀려오는 듯한 다정함을 느낀 적이 있다. 호주에서 야외영화를 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돗자리만 가져갔다. 그런데 앞에 앉으신 분들이 의자가 남는다며 우리에게 빌려 주셨고 3시간이 가까이 되는 영화를 등에 기대어 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날은 추웠지만 그 의자 덕분에 마음만은 따뜻했다.


호주에서의 일이 한 가지 더 생각난다. 공항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기내수화물 검사를 했다. 나는 분명히 기내에만 들고 탈 수 있는 짐으로 꾸렸는데 이상하게도 자동 검사기에서 내 짐에 문제가 있다고 떴다. 3번이나 했는데 3번 다 빨간불이 떴다. 나는 당황했고 친구는 짜증을 냈다. “너 도대체 짐에 뭘 넣은 거야? 제대로 싼 거 맞아?” 그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상황에 어디 끌려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엄청 당황해하고 툭 치면 울 것처럼 보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수화물 검사를 하는 아저씨는 나보고 웃으면서 그냥 가라고 했다. 나는 거기서 또 당황했다. 빨간 불이 3번이나 떴는데 가방 확인도 안 하고 그냥 가도 좋다니. 오히려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재차 물어보며 가도 되냐고 물어보았고 그 직원은 웃으며 가도 좋다고 했다. 내가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자 직원은 나에게 옷이 예쁘다며 칭찬을 했다. 그리고 이 키링은 어디서 샀냐면서 웃기다고 했다.(이 키링은 호주에서 신호등을 건널 때 꼭 눌러야 하는 버튼 모양으로 누르면 신호등을 건널 때 나는 도도도도도 소리가 난다.) 우리는 웃으면서 키링의 소리도 들려줬더니 더욱 활짝 웃으면서 최고의 기념품이라고 했다. 그 직원은 나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제야 나는 전혀 내 짐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분 좋게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이런 다정이 뜻밖의 다정함이 아닐까. 그냥 차갑게 가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분명 내 표정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일부로 나에게 옷 칭찬을 하고 키링으로 말을 걸었을 것이다. 만약 그분이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찝찝해하며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이런 뜻밖의 다정함은 평소의 다정함 보다도 더 따뜻한 것 같다. 나도 이런 뜻밖의 다정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다정을 잘 받기도 해야 한다. 당연한 것은 없다.

다정을 잘 받기도 해야 한다. 이 행동이 당연한 것이 아닌 다정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정한 것은 체력과 여유가 필요한데 그 체력을 나에게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다정한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면 정말 속상할 것 같다. 나의 다정과 배려를 꼭 알아봐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고마워'라는 한 마디가 듣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다정을 당연하게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다정을 주고 싶지 않다. 다정도 상대방이 잘 받아주어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잘 받아야지.


선우정아 님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남편께서 묵묵히 밥을 챙기고 청소를 하고 스케줄을 챙겨주셨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가족이라고 해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본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벅찬데 누군가의 하루를 챙기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선우정아 님은 그 다정함을 알아챘다. 어쩌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던 다정과 배려와 사랑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감정을 노래로 불렀다. 이 노래는 아마도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돌려 돌려하는 것이 아닐까. 나도 이렇게 다정하고 다정함을 잘 받아주는 사랑을 하고 싶다.



함구하는 다정

말은 안 하지만 이 함구하는 다정이 제일 크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다정이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다. 입이 무거운 사람은 정말 몇 명 없다. 그리고 궁금해하는 것을 못 참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모른 척하는 다정이 제일 힘들다. 소중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소문으로 듣고 바로 당사자에게 되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 경우에 당사자가 굉장히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에게 소중한 사람에게 있어서 클 수도 있는 사건이 생겼었다. 소중한 사람의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말로 전해 들었고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충분히 우리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마음을 추스르면 언젠가 말해주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 사람이 이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때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기분은 좋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약속을 잡고 웃겨줄 궁리를 하며 여러 가지 아이템(애니메이션 굿즈 망토, 야구용품, 책 등)들을 챙겼다. 가자마자 내가 아이템들을 활용해 자랑도 하고 웃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상대방은 이미 눈치를 챈 상태였다. 약속을 조금 급하게 잡은 것이 티가 난 것일까?


“왜 왔어?”

“응? 그냥 00랑 놀고 싶어서 왔지”

“거짓말인 거 다 알아. 다 알고 왔지? 왜 안 물어봐?”

알고 온 거 맞긴 한데 말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말하고 싶을 때 말해.”

“그럼 여기 왜 왔어? 내가 말 안 했으면 어쩌려고.”

“상관없어. 그냥 나는 00을 웃겨주고 싶었을 뿐이야. 때가 되면 알아서 말하겠지 뭐.”


그러자 그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주었다. 상대방은 내가 먼저 물어보지 않은 것 때문에 오히려 말을 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나에게 어느 정도 큰 감동을 한 것 같았다. 그때 느꼈다. 함구하는 다정과 배려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앞으로 입이 더 무거운 사람이 되어야겠다. 쉽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다정함은 보너스다.

나는 이 영상을 보기 전까지 무조건 모든 사람들이 다정해야 하고 친절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연실 편집자님께서 한 말에 완전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 관계에서는 내가 먼저 다정해야 한다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다정은 보너스 같아요. 이 사람한테 내가 먼저 다정할 것을 요구하진 않지만 그 보너스를 받으면 이 사람을 잊지 못하게 되는 거죠.”


사실 이 다정함은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받았던 경험이나 다정을 목격해야 나도 다정해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정해지려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모두가 다정해질 수 없을 수 있다. 나도 당장 다정하지 못한데 모든 사람들이 다정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보너스'라는 단어가 너무 좋다. 보너스는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추가로 얻게 되는 것들이다. 예상하지 못한 좋은 일이 예상했던 좋은 일보다 더 기분이 좋은 것처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받게 된 다정함으로 인해 더 큰 감정과 행복,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요하는 다정

나는 한때 프랑스의 서비스 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못 했다. 프랑스의 직원들은 ‘친절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비스직에서 일을 하더라도 그날 하루가 기분이 나쁘면 손님을 차갑게 대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 사람의 기분에 대한 인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 영혼이 없는 친절함과 다정함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사례 말고도 사회 속에서 우리는 다정함을 강요받는다.


챗 지피티에게 다정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있는 것 같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서비스직 말고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다정을 강요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억지로 다정한 말이나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감정 표현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는 차가움이 나쁨으로 읽히는 일이 많다고 말한다. 또한 SNS나 문화적 분위기에서도 “따뜻해야 한다.”. “이해심이 많아야 한다.”는 식의 메시지가 넘치는데 이는 때로 자기감정을 억누르고, 불편함이나 분노를 숨기라는 압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챗지피티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와닿았다.


“그래서 어떤 다정함은 ‘선택된 온기'라기보다, 사회적으로 기대된 태도일 때가 있어. 그럴 때의 다정은 진심이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 되지.”


나는 다정이 생존의 전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다정이 진심이었으면 좋겠다. 다정은 진심일 때 힘을 가지게 되니까. 모두가 솔직했으면 좋겠다. 자신의 마음에도 없는 다정을 주어야 할 때 얼마나 괴로울까. 하지만 모두가 그 슬픔과 힘듦을 숨기고 다정하기에 세상이 이렇게 다정하게 굴러갈 수 있겠지. 우리는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까.


이 영상에서 굉장히 아픈 말을 들었다. 원소윤 님이 알려주신 스탠드업 코미디언 조 리스트의 농담이다.


“나의 약함을 친절로 오해하지 말라.”



친절은 강함의 표현, 다정함도 체력이다

다정하고 친절하다는 것은 체력과 여유가 있어야 나온다. 이연실 편집자님도 내가 여유와 배려에 대해서 말을 했을 때 똑같은 예시를 들었다. 여유가 있어야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다정함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 스스로에게 다정하기도 벅찬데 남에게 다정하려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남에게 내어주는 에너지는 나에게 쓰는 에너지 보다도 훨씬 손실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다정을 주는 사람은 정말 강인한 사람이다.


나는 가끔 러닝을 하는 이유가 다정해지기 위해서 하는 거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보통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다정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다정하지 못한 나를 보며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러닝은 스트레스를 정말 말끔하게 없애준다. 그래서 뛰고 나면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다정하게 대할 자신이 있다. 지금생각해 보니 이래서 러닝 동아리 사람들 하고는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일까? 러닝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매일 히스테리를 부리는 괴팍한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에 JTBC마라톤 서포터스를 다녀왔다. 서포터스를 지원한 사람들 모두 내년 JTBC마라톤 티켓 보장권 때문에 신청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러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풀마라톤을 뛰어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을 하는데 한 명도 빼지 않고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우리는 주자로서의 입장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목청이 터지도록 응원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철수해야 했는데 아직 뛰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치우지 말라고도 했다. 우리는 일하는 것 보다도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들에게 스펀지를 주고 싶어 했다. 같이 서포터스로 나갔던 친구에게 이러한 일들을 말하자 이런 말을 들었다. “풀마라톤 뛰는 사람들이면 웬만해서 착하고, 열정 있는 좋은 사람들이야.” 맞는 말 같다. 이 사람들은 42.195km를 뛰는 엄청난 체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어쩌면 장거리를 뛸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다정한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러닝을 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잘하는 사람

이연실 님께서 스스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굉장히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사는 게 좋다고 하셨다.(저는 그냥 감사하고 미안할래요.) 그리고 이적님도 고맙다, 미안하다를 입버릇처럼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나는 고맙다는 표현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낯간지러워하는 이 한국사회에서 ‘고맙다'라고 말로 직접 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어렵고 부끄러울 수 있는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 엄청난 다정이라고 생각한다.


고맙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말로 직접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항상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부끄러워서 문자로 하거나 말하고 나서 약간 쑥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하고 나면 관계가 조금 더 깊어지고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제도 말했다. ‘어쩌면 투정일 수도 있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마워’,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줘서 최고기록을 세울 수 있었어 고마워’, ‘동아리 잘 이끌어줘서 고마워’, ‘문 열어줘서 고마워’, ‘내 짐 들어줘서 고마워.’ 등 지금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말한다. 어느 정도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가족에겐 더 어려운 다정

하지만 가족에게는 이런 ‘고맙다'는 표현을 아직도 못한다. 아직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가족보다도 덜 가까운 사이에게는 이제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왜 엄마, 아빠에게는 나오지 않는지 모르겠다. 노력하려고 해도 잘 안된다. 예전에 가족에게 화를 잘 내는 이유에 대해서 들었던 말이 있다. 가족을 곧 나 자신으로 동기화해서 가족이 통제되지 않을 때 화가 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참 옛날부터 알았지만 아직도 화가 난다. 아직도 통제할 수 없는 부모님을 보면 너무 밉다. 가족이 제일 미워하면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가족은 무엇이든지 지원해주려고 한다. 설령 그 지원이 필요 없을지라도 과도하게 보호하고 도와주려고 한다. 나는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하지만 부모님은 내 말을 무시하고 항상 넘치게 나를 감 싸든다. 이런 것이 너무 싫다. 하지만 나도 과도하게 부모님의 행동을 통제하고 싶어서 화를 내니 할 말은 없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다정이다.

예전에 ‘관심과 자랑'에서 불편한 배려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진정한 다정이고 곧 배려다. 선우정아 님의 말처럼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지만 이게 가까운 사이에서는 참 힘들다. 나는 언제쯤 부모님께 나의 욕심을 내려놓을 수가 있는 걸까?



나에게 다정하기

이 영상에서 이적님은 남에게 다정을 주는 것은 쉽다고 하셨는데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남에게 다정을 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 다정한 것은 더 어려운 것 같다. 나는 선우정아 님과 아주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날이 과연 올까? 온전히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죽을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자책과 죄책감이 심한 사람이어서 살면서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나마 내가 나에게 다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매일 화장을 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러닝을 나가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 어렵고 큰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스스로 자존감이 낮고 자책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나를 살리려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 나 스스로의 궁금증을 안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또한 살기 위해 먹고, 자고, 운동하고, 사람들을 만나려고 한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스스로에게 친절해졌다. 앞으로도 내가 내 자신을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내 몸뚱아리야.


+최근 읽은 먹는 욕망에서도 배려에 대해서 말하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다. 나는 배려는 곧 다정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비범한 경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실생활 측면에서도 남을 배려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다. 자신의 생존에 사용하고 남은 에너지로 배려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려는 자신의 평판을 높이고 더 많은 협력자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자신의 몸을 먹잇감으로 내어주지 않지만 사회적 구조 속에서 이웃을 배려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 준다. 인간의 모습은 고차원적인 먹잇감, 즉, 메타푸드라고 할 수 있다. 280p


배려는 단지 착한 행동이 아니라 공존의 기술이며, 문명 유지의 조건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수천 년 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이미 싹트고 있었고, 훨씬 더 이전 구석기 동굴 안에서도 피와 고기를 나누며 움찔거리던 인간들의 손길 속에서 살아 있었다.

기억하자. 법은 정의를 말하지만, 문명은 배려로 시작되었다. 약자를 보호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공감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문명의 기초석이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산은 우리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배려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인간이 된다.” 2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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