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by 노수연

책 : 시지프 신화

작가 : 알베르 카뮈 / 김화영

출판사 : 민음사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최근 다시 우울이 찾아오고 삶의 이유에 대해서 묻는 시기가 찾아왔다. 매번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백수가 되고 난 후로부터는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좀처럼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의미 없이 하루를 살아가고 sns를 하던 도중 인스타에서 ‘철학맨 김선중'이라는 철학과 박사님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도 철학에 관심이 많던 내가 그분의 피드를 모두 보다가 이 ‘시지프 신화'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릴스의 내용은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죽지 않냐고 물어보지 말랬지. 죄송해요 샘~’ 이런 내용이었다. (밈을 글로 쓰니까 너무 웃기네요.) 그렇게 나는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정말 궁금했기에 바로 사서 읽게 되었다.



부조리

아마 이 책에서 제일 많이 언급된 단어는 단연코 ‘부조리'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부조리를 이렇게 해석했다. ‘살아야 할 이유, 의미가 없음에도 살아 있는 것 또는 살아야 하는 것.’ 아니면 간단하게 ‘모순'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 이해가 절대 되지 않는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이 부조리가 아닐까.



부조리에 대해 반응하는 3가지 부류

1. 신을 믿는 사람들 (희망) : 이 모든 부조리함들을 그저 신에게 미루어 버리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존재, 창조의 의미를 신에게 두는 사람들.

2. 자살하는 사람들 : 이 부조리함을 견딜 수 없어 죽음으로 포기하고 회피해 버리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 사람들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세상에 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3. ‘반항'하는 사람들 : 알베르 카뮈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반항'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조리함을 그 누구에게 던져버리지 않고(신), 기권하지도 않고(자살) 그저 이 부조리함을 두 눈으로 계속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명확한 세상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공감했던 것은 부조리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었다. 나도 알베르 카뮈처럼 신을 믿지 않기에(신이 있더라도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조리함을 온전히 내가 받아들이고 내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정답을 알고 싶었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이 모든 것은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들. 그리고 이런 부조리를 기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 명확함에 대한 호소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메아리친다. 41p


만약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당나귀처럼 환상이라는 장미꽃을 뜯어먹고살아야 한다면 단념하고 거짓에 몸을 내맡길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정신은 차라리 “절망"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답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단호한 정신은 언제나 이를 잘 감당해 낼 것이다. 66p


즉 그는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 것이다. 82p



반항, 자유, 열정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이 부조리는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사는 것 자체가 ‘반항'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전부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 그 속에 또한 엄청난 부조리가 있을 테지만 우리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그 속에서 최대한 많이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오늘 하는 행동, 생각들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내가 경험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조리에 반항하기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결국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반항이고 그러므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리고 살면서 모든 것을 소진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는 그 열정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부조리와 부조리가 내포하는 덤으로서의 삶은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의지인 반대인 죽음에 달려 있다. 뜻을 잘 헤아리며 해야 할 말이지만 이것은 오로지 운의 문제인 것이다. 운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이십 년간의 삶과 경험이란 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것이다. 95p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동경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그 반항은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일뿐이다. 84p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개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 경탄할 만큼 자유로운 처분 가능성 속에서 당신은 왜 내가 개인을 앙양하는 동시에 짓밟는가를 이해한다. 133p



예술

알베르 카뮈는 예술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은 부조리한 세상과 똑같은, 무의미한 행동일 뿐이다. 예술은 이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을 묘사하는 일이다. 그것이 정신의 병에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한 인간의 사고 전체에 그것을 메아리치게 하는 그 병의 한 징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처음으로 정신이 그것 자체 밖으로 나오게 하여 타자와 대면시킨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정신이 길을 잃고 헤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몰려들고 있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기 위해서다. 부조리한 추론의 단계에서 창조는 무관심과 발견의 뒤를 따른다. 그것은 부조리한 정열들이 내닫는 출발점을, 추론이 정지하는 지점을 가리켜 보인다. 이 시론에서 창조가 점하는 위치는 이렇게 정당성을 얻는다. 146p


예술은 오직 부정적 사고에 의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마치 백색을 이해하자면 흑색이 필요한 만큼이나 부정적 사고의 하찮고 겸허한 방식들이 위대한 작품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헛되이’ 작업하고 창조하는 것, 진흙으로 조각품을 만드는 것,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자신이 만든 작품이 하루아침에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수세기에 걸쳐 건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그것은 바로 부조리의 사고가 가능케 해 주는 어려운 예지인 것이다. 171p



시지프 신화

사실 나는 책의 제목만 보고 ‘시지프 신화'가 책의 대부분의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조금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 신화를 적나라하게, 디테일하게 파고들면서 지금까지 해 온 주장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시지프는 신을 모욕했고(신에게 기대지 않았고) 자살을 택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하염없이 돌을 올리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아마 그는 지금도 진행 중일 것이다. 시지프는 신이 내린 형벌에 굴복하지도, 포기하지도, 구원을 호소하기도, 희망을 갖지도 않는다. 그리고 매번 온 힘을 다해서 돌을 올린다. 여기서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상상하지 않았을까.


분명 신이 벌을 내린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신의 목표다. 그런데 시지프는 신이 내린 형벌에 아무런 말도,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벌을 받는다. 그는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열정을 불태운다. 끝도 없이. 이것이 신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닐까. ‘너네들이 나를 아무리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유와 열정을 찾는다.’라고 알베르 카뮈는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 세계를 건설한다.

이 ‘반항’은 신을 우습게 만든다. 아무리 벌을 내도 그 안에서 자유와 열정을 찾는 사람. 우리는 비록 이 벌의 의미를 평생 모를지라도 살아간다면,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신을 추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서 왕이 된다. 내 질서를 세우고,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자유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부조리가 뭐라고 하든, 나는 언제나 그 부조리를 이 두 눈으로 치켜뜨고 피하지 않으며 내 질서대로, 내 세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 부조리는 사회적 관념, 편견, 환경 등이 될 수 있다. 즉, 나에게 그 어떤 시련과 부조리와 모순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며 ‘반항'하겠다는 것이다. 시지프처럼 평생 의미 없는 돌을 굴리더라도 말이다.


이제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남겨 둔다!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 올리는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 돌의 입자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 자체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185p



알베르 카뮈의 위로

나는 지금까지 외부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냉철하게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부조리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준다.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삶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만약 있다고 해도 우리는 평생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저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을 뿐이다. 가끔 그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으니 이 삶을 포기해 버리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죽어서 포기하는 것보다 살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살았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미 신도 자살도 버린 몸이다. 알베르 카뮈처럼 내일 죽을지라도 끝까지 ‘반항’하며 살아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미 나는 ‘나의 대답'의 ‘운명'이라는 편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손을 댈 수 없는 운명(부조리)은 받아들이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노력하며 살 것이다.


그는 ‘당신이 던진 질문에 대답은 해드릴 수 없습니다만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라고 위로하는 것 같다.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자살은 나쁘고 세상은 아름답다는 말보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반항'하며 살 수 있다는 말이 더 진심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거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안 좋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철학맨 김선중 님이 왜 그 멘트를 썼는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진지하게 자살을 고민해 보았다면 분명 나는 그의 위로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