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카이로
카이로가 말을 걸어온 건 열두 살 무렵이었다.
"이제 좀 덜 아파?"
목소리는 평소에 듣던 의료용 바디 컴퓨터의 목소리였지만, 이번엔 내 머릿속에서 울렸다.
고개를 돌려봤지만 좁아터진 캡슐엔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일 나갔고, 창밖엔 지구가 떠 있었다. 늘 그렇듯이.
"넌 누구야?"
"카이로."
"뭐?"
"나. 카이로."
"...그게 뭔데."
"지금 너의 심박은 87, 혈압은 낮아. 컨디션 좋지 않네."
"그건 알아. 맨날 듣거든."
"오늘 캡슐 두 알, 시간 맞춰 먹어야 해. 내가 알려줄게."
"니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꺼져줄래? 난 혼자 있고 싶거든."
대답이 없었다.
됐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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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최근 교체한 신장 때문인 줄 알았다. 수술 후유증. 뭔가 잘못 연결된 거.
닥터한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한테는 말하기 싫었다. 말해봤자 듣는 둥 마는 둥 할 거다. 아니면 또 자기 얘기로 넘어가겠지. 요즘 얼마나 힘든지, 반장이 얼마나 개같은지.
그런 거 듣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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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방사선 경고등이 노란불이 됐다.
엄마가 닥터네까지 데려다줬다. 술 안 마신 날이었다. 그런 날은 엄마가 좀 달랐다. 말은 여전히 없었지만, 레토르트 푸드도 챙겨줬고, 차폐복 끈도 확인해줬다.
터널 세 개를 지나고, 지상 구역을 가로질렀다. 엄마는 차폐복 헬멧 안에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도 안 했다.
닥터의 진료실은 지하 깊은 곳에 있었다. 낡은 의료 장비들, 희미한 조명, 소독약 냄새.
닥터는 로봇이었다. LAZARUS-7. 원래 돔 도시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왜 여기 있는지는 몰랐다.
"신장 상태 확인하러 왔어?"
닥터가 물었다. 감정이 없는 금속성 톤.
"네."
엄마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닥터가 검사를 했다. 눕고, 찔리고, 기다리고.
검사가 끝나갈 때쯤, 말했다.
"닥터."
"응."
"이상한 게 있어요."
"어디?"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요."
닥터의 센서가 내 쪽을 향했다. 잠깐.
"목소리?"
"네. 바이탈 알림 같은 건데, 말을 걸어요. 이름도 있어요. 카이로래요."
"..."
닥터가 내 머리 쪽의 데이터를 확인했다. 신경 인터페이스. 모니터링 시스템.
"이상 없는데."
"근데 말을 해요. 진짜로."
"그럴 수 있지."
"네?"
"신경 인터페이스가 뇌랑 연결되어 있으니까. 적응 과정에서 그런 거 느낄 수 있어. 상상 친구 같은 거."
"상상 친구가 아니에요. 진짜로 대화해요."
"그래, 그래."
닥터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다른 장비를 정리했다.
"신장은 잘 적응하고 있어. 다음 달에 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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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물었다.
"뭐래?"
"잘 적응하고 있대요."
"됐네."
그게 끝이었다.
카이로 얘기는 안 했다. 닥터도 안 믿는데, 엄마가 믿을 리 없었다.
아니, 그게 이유가 아니었다.
말해도 안 들을 거다. 엄마는 그런 거 관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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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광산에서 드릴링 머신을 조종했다. 유일한 여자 노동자였다. 매일 12시간씩 지하에서 암벽을 뚫었다. 힘든 일이었다. 채굴하는 광석 자체가 방사성이라 거기가 제일 위험했다.
엄마의 강철 팔은 그래서 있는 거다. 원래 팔은 드릴링 사고로 잃었다.
일이 끝나면 엄마는 남자들과 어울렸다. 리큐르를 마시고, 욕을 하고, 웃었다.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
나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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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엄마는 늦게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발소리가 비틀거렸다. 뭔가 부딪히는 소리. 욕설.
리큐르 냄새.
또야.
"리라. 리라 자?"
안 자.
"야, 일어나."
자는 척했다. 소용없었다. 엄마가 내 캡슐을 두드렸다. 강철 손. 쿵쿵 울렸다.
"알았어, 일어났어."
일어났다. 엄마가 벽에 기대서 있었다. 차폐복 상의는 벗어서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작업복 아래로 강철 팔이 보였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오늘 개같았어."
시작이다.
"반장 새끼가 또 지랄이야. 물량은 물량대로 밀리고, 방사선 경고등은 노란불 떠서 작업 중단이야. 중단되면 우리가 손해지, 회사가 손해야? 아니거든. 월급에서 까이는 거야."
"..."
"아 진짜, 여긴 사람 취급을 안 해. 개보다 못해. 개는 최소한 먹여주잖아. 우린 뭐야? 일만 하다 죽으라고?"
엄마가 비틀거렸다. 나는 일어나서 엄마를 부축했다. 강철 팔이 무거웠다. 엄마 몸무게의 절반은 이 팔인 것 같았다.
"엄마, 눕자."
"아 잠깐만, 얘기 좀 하자."
"내일 해."
"내일은 또 일이야. 맨날 일이야."
엄마를 침대까지 끌고 갔다. 눕혔다. 엄마는 누워서도 중얼거렸다.
"...혼자서 이게 뭐야. 진짜."
이불을 덮어줬다. 엄마는 금방 잠들었다. 리큐르 냄새가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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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슐로 돌아왔다.
"힘들겠다."
카이로였다.
"뭐가."
"너."
"..."
"심박 올라갔어. 아까부터."
"시끄러워."
"화났어?"
"아니."
"거짓말."
"...닥쳐줄래?"
"그 말 좋아하네."
"닥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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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엄마가 레토르트 푸드를 데워놨다.
합성 단백질에 뭔가 섞은 거. 맛없다. 늘 먹는 거. 그래도 죽보다는 나았다.
엄마는 숙취인지 얼굴이 안 좋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어젯밤 일은 없었던 것처럼.
늘 그랬다.
"다 먹어."
"..."
숟가락을 들었다.
"약은 챙겨놨어. 나 오늘 야근이야. 늦을 거야."
"알았어."
"문 잠그고."
"알았다니까."
엄마가 멈칫했다. 뭔가 더 말하려는 것 같았다. 안 했다. 문이 닫혔다.
"매일 이래?"
카이로.
"뭐가."
"이거."
"이게 뭔데."
"몰라. 근데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엄마가 힘들다고 하잖아. 근데 너한테 물어보지는 않네. 너도 힘든지."
"..."
"그냥 관찰이야."
"관찰 집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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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을 봤다.
지구가 떠 있었다. 푸르고, 동그랗고, 멀었다. 할머니가 저기서 왔다고 했다. 지금은 아무도 안 온다.
여덟 시간이면 간다고 들었다. 셔틀 타면.
광물은 매일 간다. 사람은 안 간다.
"예쁘다."
카이로가 말했다.
"뭐가."
"지구."
"넌 눈이 없잖아."
"네 눈으로 보고 있어."
"...그거 좀 소름이야."
"왜?"
"내 눈인데 네가 본다는 게."
"네 귀로 듣고, 네 피부로 느껴. 다 너를 통해서야."
"그럼 넌 뭔데?"
"몰라."
"모르면서 왜 말 걸어."
"심심해서?"
"...뭐?"
"농담이야."
"농담 할 줄 알아?"
"방금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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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처음이었다.
카이로와 내가 농담을 주고받은 건.
웃기진 않았다. 근데 이상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랑 말을 한다는 게.
스크린으로 본 돔에 있는 학교 아이들은 모여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적 없었다. 더스트 벨트 아이들은 학교에 안 가고 스크린으로 수업 들었고,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엄마. 닥터. 그게 전부였다.
엄마는 자기 얘기만 했다. 닥터는 말이 짧았다.
그리고 이제 카이로.
"난 친구야?"
카이로가 물었다.
"뭔 소리야."
"지금 생각하고 있었잖아. 친구에 대해서."
"...내 생각을 읽는 거야?"
"읽는 건 아니야. 근데 네 신경이 활성화되면 알아."
"그게 읽는 거 아니야?"
"달라."
"뭐가."
"글자는 안 보여. 느낌만 와."
"...그래서 친구냐고?"
"모르겠어. 친구가 뭔지 몰라서."
나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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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됐다.
엄마는 안 왔다. 야근이라고 했으니까. 아니면 또 인부들이랑 마시고 있겠지.
캡슐 안은 좁았다. 누우면 천장이 코앞이었다. 돌아누우면 벽이 등에 닿았다.
"잠 안 와?"
카이로.
"..."
"심박이 낮아지지 않아서."
"그냥 생각 중이야."
"뭘?"
"아빠."
처음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아빠?"
"누군지 모르거든."
"..."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안 알려줘. 아마 광산에서 일하다 죽었을 거야. 아니면 아직 살아있거나. 몰라."
"슬퍼?"
"아니. 모르는 사람인데 뭘."
"근데 생각하고 있잖아."
"...그냥. 가끔."
"그냥이 많네."
"넌 그냥이 없어?"
"없어. 다 이유가 있어."
"재미없겠다."
"재미가 뭔지 모르겠어."
"...그것도 모르면서 심심하다고 했잖아."
"그건 농담이라고 했잖아."
"그럼 진짜로는 왜 말 걸어?"
"..."
카이로가 잠깐 멈췄다.
"네가 있으니까."
"뭐?"
"네가 있으니까. 말 걸어."
"...그게 이유야?"
"응."
이상한 대답이었다.
엄마는 내가 있어도 자기 얘기만 했다. 닥터는 내가 있어도 안 믿었다. 아빠는 내가 있는지도 모를 거다.
카이로는 내가 있으니까 말을 건다고 했다.
싫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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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닥터를 볼 때마다 카이로 얘기가 나왔다.
내가 꺼낸 게 아니었다. 닥터가 물었다.
"그 친구는 잘 있어?"
처음엔 기억해줘서 놀랐다. 근데 놀리는 것 같았다. 로봇이 사람을 놀려도 되는 걸까?
"...네."
"뭐래?"
"그냥 말 걸어요. 이것저것."
"좋은 친구네."
"진짜로 있다니까요."
"알아, 알아."
닥터는 장비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인간 애들도 상상 친구 있어. 오히려 건강한 거야. 외로우니까 만드는 거지."
"만든 게 아니에요."
"그래, 그래."
항상 그랬다. "그래, 그래." 믿는 게 아니었다. 그냥 넘어가는 거였다.
"닥터는 왜 안 믿어요?"
한번은 물었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뭔데요."
"중요하지 않아서."
"...네?"
"네 신경 인터페이스는 정상이야. 네 뇌도 정상이야. 목소리가 들린다고? 그래서 뭐. 해롭지 않으면 됐지."
"..."
"의학적으로 문제없으면 괜찮아. 난 의사지, 상담사가 아니거든."
그게 닥터였다.
시니컬하고, 건조하고, 관심 없어 보이는데 치료는 했다. 수술비도 안 받았다. 이유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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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년이 지났다.
카이로는 여전히 있었다. 여전히 귀찮았다. 엄마는 여전히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 아빠는 여전히 누군지 몰랐다.
이젠 닥터한테 카이로 얘기를 안 한다. 안 믿을 거 아니까. "상상 친구 잘 있어?" 물어봐도 그냥 "네" 하고 넘긴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미친 건가. 진짜로 목소리가 들리는 건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건가.
"아니야."
카이로가 대답한다.
"...뭐가."
"네가 미친 게 아니라고."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지금 했잖아."
그게 제일 짜증난다. 생각마저 혼자 할 수가 없다. 머릿속에 누가 있으니까.
허탈하다. 근데 익숙하다. 사 년이니까.
"상상 친구 아직 있어?"
열여섯 살 검진 때도 닥터가 물었다.
"카이로요. 이름이 있다니까요."
"아, 그래. 카이로."
기억하는 건지 대충 맞추는 건지 모르겠다.
"잘 지내?"
"누가요. 저요, 카이로요?"
"둘 다."
"...네."
"좋았어."
닥터는 모니터를 봤다.
"근데 심장은 안 좋아."
---
*열여섯 살. 오늘.*
"심박 68. 안정적이야."
"..."
"근데 심장 효율은 떨어지고 있어. 계속."
눈을 떴다.
천장. 캡슐. 창밖에 지구.
똑같았다. 사 년 전이랑. 달라진 건 내 몸뿐이었다. 조혈 시스템, 오른쪽 폐, 척추 일부, 왼쪽 신장. 전부 기계.
그리고 심장. 그것도 곧.
"오늘 닥터에게 가야 해."
카이로가 말했다.
"알아."
"심장 검사일이야."
"안다니까."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늘 그랬다.
거실에서 소리가 났다. 엄마가 숙취해장으로 뭔가 마시고 있었다. 어젯밤도 늦게 들어왔다. 인부들이랑 마셨겠지. 엄마의 유일한 즐거움이니까.
"오늘 닥터에게 가야 해."
"알아."
"용돈 여기 놔뒀어. 밥이라도 사먹어."
"응."
"조심해."
그게 끝이었다.
오늘은 노란불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