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12)

수연 : 제주도

by 빌리박


수연 : 제주도


제주 공항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비릿한 바다 냄새. 겨울바람. 머리카락이 헝클어지며 뺨에 달라붙었다. 서울과는 다른 공기였다. 냄새, 바람, 온도 —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피부가 전부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코가, 귀가, 손끝이 — 전부 열려 있었다.


공항 앞 차도에서 배기가스와 바다 냄새가 뒤섞였다. 야자수가 바람에 휘어지고 있었다. 렌터카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관광객들의 캐리어 바퀴가 아스팔트 위를 굴러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소리가 너무 많았다. 전부 한꺼번에.


다리가 풀렸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수가 부축했다. 렌터카 뒷좌석에 태워주고 담요로 감싸주었다. 문이 닫히고 바깥이 차단되자 — 겨우 숨이 돌아왔다. 차 안은 고요했다. 새 차 냄새가 났다. 방향제의 인공적인 꽃향기. 유리 너머로 세상이 무음 영화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괜찮아, 수연아. 나 여깄어."


차가운 물티슈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눈을 감았다. 지수의 손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담요 아래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서울에서는 아파트 안에만 있었으니까 몰랐다. 바깥 세계가 이렇게 크고 시끄럽고 날카로운 것인지.


***


중문 단지의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하는 동안 대리석 바닥의 발소리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이 높은 천장 아래서 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귀가 먹먹해졌다.


객실 문이 열렸다. 넓었다. 킹사이즈 침대, 갈색 가죽 소파, 대형 유리창. 창밖으로 겨울 바다가 보였다. 회색 하늘 아래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소리가 창 너머로 아득하게 들렸다.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지수가 뒤에서 안아주었다. 턱이 어깨에 얹혔다. 체온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나 사랑해?"


"응. 사랑해. 이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에 사랑 같은 건 없어."


지수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밤바다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지고. 밀려왔다가 빠지고. 그 리듬이 숨결처럼 반복되었다. 오래간만에 평화로웠다.


***


이튿날.


오전에 해안 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 현무암 돌담이 스쳐 지나갔다. 돌담 너머로 억새가 바람에 눕고 있었다. 귤나무 밭이 지나가고, 그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바다색이 구간마다 달랐다. 짙은 남색에서 초록으로, 다시 회색으로.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출 때만 바다가 잠깐 푸르게 빛났다.


점심은 해안가의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플라스틱 의자. 벽에 낡은 메뉴판이 붙어 있었고, 주방에서 국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라디오 소리. 유리창에 김이 서려 바깥 풍경이 뿌옇게 보였다.


해물뚝배기를 시켰다. 뚝배기가 나왔을 때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김이 얼굴까지 올라왔다. 매콤한 냄새. 천천히 떠먹었다. 예전처럼 급하게 먹지 않았다. 숟가락을 쥐는 방식이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식사 후 해변을 걸었다. 검은 모래였다. 현무암 자갈이 파도에 씻겨 반들반들했다. 발밑에서 자갈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찰각찰각 났다. 멀리 방파제 끝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울었다. 겨울 바다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둘뿐이었다.


지수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컸다. 내 손을 완전히 감쌌다. 바람이 세서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우리... 괜찮은 거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파도가 발밑으로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모래가 발 아래에서 쓸려나갔다. 서 있는 땅이 자꾸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수는 더 묻지 않았다. 파도만 계속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


저녁.


지수가 호텔 최상층의 라운지 바에 가자고 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창밖의 바다가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평선 위에 걸린 구름이 불에 탄 것처럼 붉었다.


옷장 앞에 섰다. 옷장 문에 달린 전신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호텔 가운 차림. 블랙 미니 드레스를 꺼냈다. 등 라인이 견갑골 아래까지 깊게 파여 있었다. 지수가 사준 옷이었다. 한 번도 입지 않았다. 행어에 걸려 있던 모습 그대로 구김 하나 없었다.


거울 앞에서 들어보았다. 내려놓았다. 다시 들었다. 천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매끄럽고 무거운 원단이었다.


입었다.


거울 속의 여자. 등이 드러나 있었다. 어깨뼈, 척추의 라인, 허리의 곡선. 낯선 사람 같았다. 조명 아래서 피부가 하얗게 빛났다.


지수가 욕실에서 나왔다. 수증기가 따라 나왔다. 나를 보았다. 잠깐 말이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예뻐."


"너무 야해?"


"아니."


잠깐 뜸을 들였다.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근데 남자들이 많이 볼 텐데."


그 말에 — 가슴이 뛰었다. 왜.


"괜찮아."


왜 괜찮은지 나도 몰랐다.


***


라운지에 들어섰다. 조명이 어둡고, 음악이 낮게 깔려 있었다. 재즈. 색소폰 소리가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칵테일 잔이 부딪히는 소리, 낮은 웃음소리, 향수 냄새가 섞인 공기. 천장에서 내려온 간접 조명이 사람들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쌌다. 바 뒤편으로 제주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불빛들. 어선인지, 횟집의 간판인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느껴졌다. 등을 타고 내려가는. 어깨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다리로. 시선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의식되었다. 힐이 카펫 위를 밟았다. 소리가 죽었다. 소리 없이 걸었다.


바 스툴에 앉았다. 가죽 시트가 차가웠다. 맨 등이 등받이에 닿았다. 칵테일을 주문했다. 바텐더가 셰이커를 흔들었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가 리듬처럼 울렸다. 잔이 놓였다. 연분홍색 액체가 조명을 받아 빛났다. 한 모금 마셨다. 알코올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뜨거운 것이 위장에서 퍼졌다.


지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수가 뭔가를 말했다. 웃었다. 나도 웃었다. 바 너머로 바텐더가 잔을 닦고 있었다. 재즈 곡이 바뀌었다. 트럼펫이 느리게 울었다. 평범한 저녁이 될 수 있었다.


수트 차림의 남자 세 명이 다가왔다. 비싼 구두가 카펫 위를 밟는 소리.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거절해야 했다. 지수를 보았다. 지수도 나를 보았다.


"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수의 눈에 뭔가가 스쳤다. 잡히지 않는 것. 불안인지, 실망인지. 칵테일 잔을 잡은 손가락이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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