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 그녀, 내남편(34)

지수 : 귀가

by 빌리박


지수 : 귀가


택시가 숙소 앞에 멈췄다.


아침 공기가 차가웠다. 영하 2도. 어젯밤 입고 나간 옷 그대로였다. 네이비색 재킷에 하얀 블라우스. 구겨진 옷에서 호텔 시트 냄새가 났다. 목을 만졌다. 스카프 아래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삐- 삐- 삐. 문이 열렸다.


"수연아?"


대답이 없었다.


신발을 벗었다.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 위에 쿠션이 눌린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오래 앉아 있었던 흔적. 커피 테이블에는 물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물이 절반쯤 남아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차가웠다. 밤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침실 문을 열었다. 이불이 개켜져 있었다. 화장실도 확인했다. 베란다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옷장을 열었다. 수연의 옷이 줄어 있었다. 내가 사준 원피스와 블라우스는 그대로였지만, 수연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 몇 벌 안 되는 편한 옷들만 없었다. 세면대에는 칫솔이 하나. 내 것만 남아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수연의 속옷과 양말도 없었다. 작은 기내용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휴대전화를 꺼냈다.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다섯 번 울렸다.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여섯 번. 일곱 번. 역시 받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냈다.


[수연아 어디야? 전화 좀 받아.]


전송됨. 읽음 표시는 뜨지 않았다.


유진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만에 받았다.


"지수야? 왜?"


"언니, 수연이 어디 있는지 알아?"


"수연이? 어젯밤에 너 어디 있냐고 전화했었어. 그 이후로 연락 없는데. 왜? 무슨 일이야?"


손이 떨렸다. 어젯밤. 수연이 나를 찾았구나. 내가 마이클과 함께 있을 때. 호텔 스위트룸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을 때. 그 이후의 모든 시간 동안.


"수연이가 없어. 짐도 싸서 나간 것 같아."


"뭐?"


유진 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잠깐, 내가 연구소 쪽 확인해볼게. 어디 간 거 아는 사람 있는지. 너도 다른 데 연락해봐."


"응. 언니 고마워."


전화를 끊었다.


***


소파에 앉았다.


쿠션의 눌린 자국을 손으로 만졌다. 수연이 밤새 여기 앉아 있었겠구나. 나를 기다리면서. 돌아오지 않는 나를. 연락도 없이. 밤새. 이 자리에서. 혼자.


눈이 뜨거워졌다.


어젯밤이 떠올랐다. 호텔 스위트룸. 32층. 통유리 너머로 보이던 야경.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마이클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을 때. 입술이 닿았을 때. 침대로 이어졌을 때. 그 다음의 모든 것.


수연이 밤새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른 남자의 품에 있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숨이 막혔다.


제주도에서 수연이 한 일. 그때 나는 배신감을 느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남자한테 키스를 당했다고. 그것만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는 똑같은 짓을 했다. 아니. 더 나빴다. 수연은 뉴럴 쇼크 때문에 자기 몸을 통제하지 못해서였다. 원한 게 아니었다. 나는 알면서 했다. 원하면서 했다. 스스로 선택해서.


그 생각이 목을 조였다. 잠깐 동안.


그래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일어섰다.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정장. 흰 셔츠. 얼굴을 씻고 화장을 고쳤다. 목의 자국은 스카프로 다시 가렸다. 거울 속의 내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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