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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준 Nov 21. 2021

# 친절하지 않은 간호사가 되기로 했다

친절한 간호사는 임상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다. 내 첫 직장의 부서는 중환자실이었다. 병동 간호사가 중환자실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중환자실 간호사도 병동 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지금은 1년 가까이 코로나 격리치료 병동에서 근무하며 병동의 루틴 업무나 병동 간호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중환자실에 근무할 땐 병동 업무가 너무 궁금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증환자를 본다는 부분에선 부럽기도 했다. 환자나 보호자들과 대화하며 라포를 쌓는 경험은 중환자실에선 흔치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일하면 출근부터 퇴근까지 말없이 일만 하게 된다. 인계나 노티 할 때를 제외하곤 입에 단내 나게 일만 하는 게 일상이었다.


처음 병동에 왔을 때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이 내가 병동 간호사가 아닌 걸 바로 알아 맞혔다. 어떻게 맞춘 건지 물어보니 내가 환자가 말하는 걸 다 들어주고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하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했단다. 실제 병동에서 그렇게 환자나 보호자들의 말을 다 듣고는 절대 주어진 업무를 소화할 수 없다고. 맞는 말이었다.


보통 한 명의 병동 간호사가 평균적으로 15-30명의 환자를 본다. 정서적 지지나 공감도 치료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지만, 눈앞에 투약이나 처치도 못하고 있는데 정서적 지지가 웬 말인가. 일이 바쁘고 업무강도가 높아지니, 결국 나중엔 나도 기계적으로 할 말만 하게 되더라. 그렇게 초심을 잃고 점점 친절과는 멀어지게 된다. 누군가는 바쁘다고 친절할 수 없는 건 변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든 와중에 끝까지 친절하게 웃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선생님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임상에 오래 못 버티고 다 떠나더라. 강한 업무 강도에 일종의 감정 노동까지 하고 있는 셈이니 더 힘들 수밖에.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간호사들이 친절하고 일 밀리는 간호사보단, 친절하지 않고 일을 처리해 내는 간호사가 되기로 선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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