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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준 Apr 29. 2020

#7. 웨이팅게일이 되다

에세이‘사막을 달리는 간호사’

병원에 최종 합격한 후 일을 시작하기 전의 발령대기 기간을 ‘웨이팅 기간’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이 웨이팅 기간이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졸업 직후 병원으로 바로 불려가기도 하지만 길게는 1년 가까이 병원의 발령을 기다리기도 한다. 취업 후 바로 일을 시작하지 못해 중간에 붕 떠버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기를 가장 황금 같은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당장은 일을 하지 않는 한량이지만 그렇다고 취업을 하지 못한 백수가 아닌 그 애매한 경계에서 당당하게 놀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백수’가 아닌 당당한 ‘갓수'로 지낼 수 있는 기간이다. 무엇보다 일단 일을 시작하게 되면 사직을 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길게 쉴 수 있는 시기는 좀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발령 후 신규가 되면 일을 배우며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때는 놀고 싶어도 제대로 놀 수 없을테니 웨이팅 기간에 영혼을 불태우며 후회 없이 놀아 둬야 한다.   

  

물론 간호사로서 빨리 일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휴학을 하지 않고 쉴 틈 없이 달려왔기에 웨이팅 기간은 지난 4년간 간호학과 공부를 하며 빡빡한 대학생활을 보낸 나에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입시와 취 업 등을 위해 정신없이 살아왔다면 일하기 전의 이 발령대기 기간은 온연히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발령 전까지 소중한 이 시기를 의미 있는 시간들로 채워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만 많다고 해서 한없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돈이었다. 이제 대학교를 갓 졸업하여 사회에 발도 내딛지 않은 나에게 충분히 놀 만큼의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집에 돈이 많은 금수저도 아니었기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필요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우선 구직 사이트를 방문해 돈이 될 만한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구직 사이트에는 일할 사람을 구하는 다양한 구직 게시물이 있었다. 많은 일자리 중 짧은 시간 동안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흔히 ‘노가다’라고 부르는 일용직 아르바이트였다. 육체적으로 조금 힘들 수도 있겠지만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기에는 제격이었다. 내가 하게 된 일은 각종 공연장과 행사장에서 천막과 의자를 설치하고 해체하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매번 이런 행사에 참여할 때 누가 이 많은 천막을 설치하고 의자들을 가져다 놨는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성공적인 공연과 행사가 이루어지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앞 다투듯 많은 행사와 공연들이 열렸다. 그 덕에 일용직이었지만 쉬는 날 없이 매일같이 일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낯설었던 일들도 점차 손에 익으면서 일이 더욱 수월해졌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육체적으로 고되긴 했지만 힘든 만큼 통장의 잔고를 더욱 빨리 늘릴 수 있었다. 하루하루의 일급은 그렇게 큰돈은 아니었지만 많은 하루들이 쌓여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만큼의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이유는 내 최고의 여행 버킷리스트였던 남미를 여행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동남아나 일본 같은 가까운 나라는 일을 시작하고도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남미는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도 꼬박 하루가 걸리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웨이팅 기간처럼 길게 쉴 수 있는 기간이 아니면 쉽게 갈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웨이팅 기간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최적의 시기였다. 총 70일의 남미 여 행 동안 나는 남미 6개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평생 잊지 못할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다.      


볼리비아 - 순백의 소금사막
브라질 - 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 짜릿한 스카이 다이빙
에콰도르 - 갈라파고스 제도 펭귄과 셀피
칠레 -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과 함꼐
페루 - 마추픽추에서


에콰도르에서는 학교 수업시간에만 들어 봤던 적도를 직접 내 두 다리 로 밟아 보고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생각해 냈다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야생 펭귄, 물개들과 함께 수영을 하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페루에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잉카 문명의 마추픽추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볼리비아를 여행할 때는 거대한 순백의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멋진 인생 샷을 찍을 수 있었고 악 어가 득실대는 아마존 정글 속으로 들어가 식인 물고기인 피라냐를 낚시로 잡아먹으며 살아 보기도 했다. 칠레의 이스터섬을 여행하면서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거대한 모아이석상을 만날 수 있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스카이다이빙을 난생 처 음 경험했고 신나는 리듬에 맞춰 탱고 댄스를 추는 잊지 못할 경험을 하기도 했다. 브라질에서는 거대한 이과수 폭포를 보며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기도 했다.    

  

 스무 살 때 첫 해외봉사를 통해 해외를 경험한 후 대학생 때는 방학 마다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구 반대편인 남미 여행도 다녀왔다. 문득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혼자 서만 너무 좋은 곳들을 다녔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어머니에게 함께 해외여행을 가자 고 제안했다. 내가 제안한 여행이 편안한 패키지여행이 아니었음에도 다행히 어머니가 나의 여행 메이트가 되는 것을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 3박 4일간 대만 여행을 떠났다.     

 

 혼자 하는 여행 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에게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여행 루트를 짜는 것부터 시작해서 먹는 것, 교통편 등 을 하나하나 고민하고 신경써야 했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패키지여행으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끝나고 나니, 여행 중에 고생하며 어머니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녔던 것이 더욱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함께 공유할 즐거운 추억들을 잔뜩 만들 수 있었던 대만 여행은 나와 어머니 모두에게 너무나도 뜻깊은 여행이었고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여행이라는 것은 잠깐의 순간일지 모르지만 그 여행을 통해 얻은 추억은 평생 동안 몇 번이고 곱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을 하며 돌이켜봤을 때 웨이팅 기간 때의 기억들 이 힘든 시기에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어머니와 함꼐 대만에서


 여행을 모두 다녀온 이후에도 배우고 싶었던 악기와 운동을 배우고 틈틈이 국내 여행도 다니며 나를 위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즐거운 웨이팅게일 생활을 즐기며 누구보다 알찬 시간들을 보냈다. 다시 생각해도 이때의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걱정 없이 놀 수 있었던 황금기였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웨이팅 기간도 어느덧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고 없이 걸려온 한 통의 전화와 함께.     


“여보세요?”

“네, 김보준 선생님 맞으시죠? 선생님은 12월 발령 대상자입니다.”     


웨이팅의 끝을 알리는 발령 전화 한 통으로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그래도 남들보다 긴 웨이팅 기간 동안 그 누구보다도 잘 보냈다고 말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사실 계속 놀다 보니 이제 안정적인 직장에서 제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기던 찰나였다.      


언제까지나 웨이팅게일로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에세이‘사막을 달리는 간호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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