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_ J.D 샐린저
코울필드의 질풍노도
그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를 원하며 순수함과 정의로움을 동경하는 코울필드의 이야기.
그야말로 인생 지랄총량 중에 90% 이상을 보여주며 질풍노도의 좋은 예가 되는 코울필드의 단 며칠의 이야기다.
사춘기라는 말로도 이해되기 힘들어 보이는 코울필드의 사고방식과 행동거지를 따라가며 읽었다. 코울필드의 엄마로서는 읽기 거북했으나 타인의 삶이라고 생각하니 부럽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힘들게 살아왔고 나는 그것들을 모두 보고 자랐다. 그 모든 것을 체득한 나의 기억 속엔 딱히 내 멋대로의 삶을 살아본 기억이 없다. 힘든 부모님을 배반할 수는 없어서 인지 아니면 타고난 유전자가 소심해서인지는 모르겠다.
40대 중반이 지나가는 지금에서야 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반대하는 아빠의 뜻을 거역하고 처음으로 나의 고양이 루이를 만났다. 결혼을 했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자녀도 두 명이나 있는 엄마이다. 그런 사람이 고양이 키우는 것을 아빠에게 허락을 맡은다는 것이 남들에게는 참으로 의아한 것일 테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빠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는 사람, 몹시도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막상 고양이를 기르는 나를 두고 아빠는 단 한 번도 타박하지 못하셨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나의 일탈이었다. 그것은 나의 최초의 반항이었고 실질적인 독립이었다.
코울필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무언가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같은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들이 왜 이 책이 유명한 것인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게 무슨 의미 인지 알았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코울필드가 무척 부러웠다. 우리 모두는 엄마인지라 코울필드를 이해해 주긴 어렵다. 인간으로서도 마찬가지 우리들은 절대로 코울필드처럼 살 수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때가 아니고서야 어찌 제멋대로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물론 내 자식이 그렇다면? 진심으로 상상하고 싶지 않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가는 코울필드의 시각이 언뜻 보면 어른이 된 지금의 나와 비슷하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가령 앞과 뒤의 말이 다른 사람들, 공식석상에서는 청렴을 논하면서 밖에서는 사욕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가식적이고 거짓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지금도 실 컷 뒷담을 하고 만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타인에겐 냉철한 이중인격자들과 섞여 살다 보니 코울필드의 마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겠다. 절대적으로 삐툴어지고 말겠다는 코울필드를......
순수하고 맑은 피비가 옆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은 부모가 있으니 마음껏 망나니처럼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또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학교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참된 어른이 되어준 앤톨리니 선생님이 있어서 또 다행이다. 그런데 왜 훌륭한 앤톨리니 선생님마저도 변태여야 했는지 어째서 제대로 된 어른이 이렇게도 없는지 너무나 안타까웠다.
겨울이 되면 공원 연못에 살던 오리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했던 코울필드가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사춘기 소년이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피비의 맑은 영혼에 산산이 부서져버렸지만......
나는 좀 더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으며 또 나의 자녀들이 평범하게 잘 자라주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