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로잡힘’이라는 단어가
자꾸 마음에 남았다.
나는 분명 자유롭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무언가에 붙잡혀 있었다.
잘해야 한다는 기준,
이미 알고 있다는 부담,
실수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
그걸 가장 분명하게 느낀 건
운동 이야기에서였다.
나는 운동을 잘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리기를 진짜 싫어한다.
이상해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태권도 선수 시절
달리기는 늘 평가의 대상이었다.
기록, 호흡, 자세, 순위.
몸은 앞으로 나가는데
머리는 계속 채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달리기는
움직임이 아니라
압박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전지훈련을 갔을 때였다.
시골 논밭길을
다른 학교 친구 한 명과 함께 뛰었다.
누가 빠르냐도 없고
기록도 없었다.
“힘들면 조금 천천히 뛸까?”
그 말 한마디에
우리만의 리듬이 생겼다.
그날 처음으로
다리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힘들었지만
완주하고 나니
묘하게 상쾌했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만났다.
혼자, 아무 목표 없이
생각을 내려놓고 뛰는 달리기.
빛의 느낌,
계절의 온도,
공기의 상태를 느끼는 시간.
그 이야기가
다시 뛰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왔다.
그래서 나는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동을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달려보기로 했다.
기록도 신경 쓰지 않고
폼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설렁설렁.
고글까지 준비했다.
아직은 날이 추워
몸을 조금 사리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한 발 나가 있다.
이 생각은
그림으로도 이어졌다.
나는 그림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내 그림 앞에서는 늘 사로잡혀 있었다.
잘 그린 그림,
잘 담긴 철학,
잘 정리된 기법.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
그래서 요즘은
‘풀려나기’를 연습하고 있다.
자기 검열의 잣대를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
놀이처럼 접근해 보는 연습.
최근에 만난 김인규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그 마음이 더 분명해졌다.
장애와 비장애 친구들이 함께
그림을 그리는 스튜디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질문을 던졌고
돌아온 키워드는 같았다.
사로잡힘, 그리고 풀려남.
누가 풀어주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풀려나는 것.
그게 나에게 필요하다는 걸
그제야 인정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덜 붙잡히려고 애쓴다.
잘 뛰는 사람이 아니라
뛰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려도 무섭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아직은 서툴고
아직은 시작도 못 한 날이 더 많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건 도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선택이라는 것.
사로잡힘에서
조금씩 풀려나고 있다.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