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_ 폭풍우 같은 오춘기

by 루아 Rua

대학교 2학년 때 교수님들은 나를

‘폭풍우 같은 오춘기’라고 불렀다.

2학년 1학기, 2학기 모두 올 F를 맞았다.


학교에는 거의 가지 않았고 술과 방황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기를 떠올리면 늘 물음표가 먼저 떠올랐다.

‘왜 그렇게까지 무너졌을까?’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면 17살의 내가 있다.

나는 태권도 전국체전 대전 대표 선수였고

감독님의 신임을 받는 국가대표 후보였다.

그 자리는 겉으로 보기엔 영광이었지만

안에서는 전혀 달랐다.


폭력 위주의 훈련, 몰아붙이는 방식, 미래를 고민할 여유조차 없는 구조.

종주국에서 태권도 국가대표가 되는 일도 쉽지 않았고

설령 된다 해도 여성이라는 성별로 운동판에서 오래 버티는 삶이

과연 나에게 가능한지 까마득해 보이기 시작했다.

공부도 못하고 여성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맞이할

20대 중반의 은퇴 이후 삶 같은 현실이 암담해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사실 도망이었지만 핑계 아닌 핑계라면

도망이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계산에 가까웠다.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서울의 4년제 대학교에 가야 한다 생각했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때 떠오른 게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3학년 때

잠깐 했던 미술이었다.

문제는 나는 수포자였다는 것.


고3 때 수능 수학 점수는 바닥을 쳤고

결국 서울 진학에 실패했다.

그래서 재수를 했다.


수학을 다시 잡았고 상위 3%까지 끌어올렸다.

수능 총점도 상위 5%.

미술 실력은 대치동 대형 미술학원에서도

200명 중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 결과

서울시립대 산업디자인과 차석,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에 합격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긴 선택은 서울시립대였다.


하지만 나는 추계예대를 택했다.

지금 생각해도 매우 똘끼 있는 선택이었다.


입학 후 교수님에게서 “성적 빨로 붙었다”는 말을 들었고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1학년 내내 죽어라 했다.

실기 수석을 받고 매달 상을 탔다.


그때부터도 나는 학생이면서 강사였다.

대치동에서는 수채화와 소묘를 가르치고,

노량진에서는 발상과 표현 연구강사로 수업을 했다.

겉으로 보기엔 무난히 밟고 올라가는 삶이었다.

성취도 있었고 인정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복하지 않았다.


올라갈수록 미술은 점점 나를 기쁘게 하지 않았다.

대신 끝없는 고민의 늪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나는 술과 방황 속에서

이유 없는 오춘기를 보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명했다.


그 방황은 결국 술에 취해 경찰서에 가면서 끝났다.


지금 와서야 그때의 내가 보인다.

그 시기의 나는 게으른 것도, 문제아도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인생을 끝까지 밀어붙여 본 사람이

또 다른 방식의 ‘버텨야만 하는 삶’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뿐이다.


폭풍우는 아무 이유 없이 오지 않는다.

그건 방향을 바꾸기 전 반드시 지나야 했던

기압 변화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그걸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