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잡힘에서 풀려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가장 오래 덮어 두었던 곳으로
마음이 향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일들.
기억 속에서도
일부러 흐릿하게 만들어 두었던 장면들.
정신과 상담실에서
나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 걸렸고
말하는 동안 자주 멈췄다.
과거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처음엔 괴로웠다.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숨이 막히고
마음이 쿡 내려앉았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살아보니
그 시절의 어른들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왜 그런 말과 행동이 나왔는지는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상담 중에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과거는
화석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고.
이미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졌고
이제 와서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 없다고.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그 화석을 껴안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분노 속에서 보내는 하루가
나에게 좋은 미래가 될지,
아니면
그 화석은 그렇다고 두고
그 위를 딛고 서서
지금의 가족과 사람들,
지금의 시간을 보며
하루를 채워가는 삶이
나에게 좋은 미래가 될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나는
화석을 없애려 하지 않기로 했다.
잊지도, 미화하지도 않기로 했다.
대신
그 위에 발을 딛고 서기로 했다.
그때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는 사실을
하루하루로 증명해 가기로 했다.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라는 말이 있다.
예전엔
그 말이 조금 거칠게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그 말을 이렇게 이해한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계속 살게 하기 위한 선택.
과거를 끌어안고
현재를 놓치는 삶 대신
과거를 인정하고
현재를 채워가는 삶.
요즘 나는
그 연습을 하고 있다.
과거는
여전히 거기 있다.
화석처럼,
움직이지 않은 채.
하지만
그 위를 딛고 서 있는 나는
조금씩
앞을 보고 있다.
그걸로
지금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