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1
수진이 떠난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이름 모를 곳으로 몇박 여행을 다녀온 그녀가 국제전화로 전화통화를 한 것이 우리의 마지막 통화였다. 그 곳에서 이름 모를 사람과 만나 결혼을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떤 요동도 없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수진과 헤어짐을 통보받은 이후 지금까지도 나는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를 만날 때에도 나는 늘 그 빈구석을 느껴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춘천가는 2시차는 매진이에요, 6시 차뿐이 없네요." "네, 그걸로 주세요."
-할머니, 저녁차 뿐이 없다는데, 택시가 있을까요. 먼저 주무세요. 근처 친구네 집에서 묵고 아침버스로 갈게요.
춘천에 도착하니 10시가 좀 안된 시간이었다. 할머니댁은 6시면 차가 끊기는 시골에 있어서, 택시를 불러 들어가든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몇 시간 버스를 타고 내려 텁텁한 공기에 자연스럽게 바깥 간의의자에 앉았다.
-빵빵
회색 승용차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가만있어, 김씨댁 손잣아니오?" "안녕하세요? 누구.." "몰라보게 컸네, 옆집에 송아저씨 몰라보겠나?" "아, 안녕하세요."
"집에 가는 길이면, 어서 타"
송씨 아저씨의 기억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미술아저씨, 송아저씨로 불리던 사람, 내가 할머니댁에 놀러갔을 때, 어린 꼬마와 아저씨는 우리 옆집으로 이사를 왔었다. 이미 동네에서는 도시에서 가진 전재산에 산 집을 화재로 날리고 왼쪽 팔에 화상의 흔적을 남긴 채 시골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송아저씨는 주택집에 미술학원을 차려 온동네 아이들이 하루종일 그 곳에 끊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조수석에 누가 앉아있길래, 말없이 뒤에 탔다.
"이 밤에 터미널은 어쩐일이세요?"
"응, 아이스크림이 먹고싶어서 우리 딸이랑."
"아, 덕분에 차도 얻어타고 좋네요."
조수석에 탄 사람은 송아저씨의 딸이었다. 이삿짐을 나르고 있을 때, 아저씨의 바짓단을 붙잡고 울고 있던 그 꼬마.
그녀는 내가 탔는데도 별 말이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가면 할머니도 주무실텐데, 여기서 자고 가. 밤도 늦었고. 뭐하면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
차 안은 매우 어두웠다. 차 밖도 어두웠다. 들리는 거라곤, 아저씨의 너털웃음, 감기가 걸렸는지 딸이라는 여자의 훌쩍거림 등이었다.
송 아저씨의 집은 니스를 바른 따듯한 목재가 빼곡히 천장과 벽을 덮고 있었고, 거실 가운데는 통난로가 있었다.
송 아저씨가 땔깜을 창고에서 가지고 오는 사이 나는 그녀와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수국차 드릴까요?"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네, 아무거나 따듯한거 주세요."
그녀의 눈썹이 살짝 열린 난로 때문인지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차를 따르는 그녀의 손을 나는 아지랑이 사이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손톱, 정갈하게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좀 뜨거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수국차를 마시니 온 몸에 따듯한 기운이 퍼졌다. 수국차는 매우 달았다.
"이거 되게 신기한 맛이네, 설탕 타셨나요?"
그녀가 입술을 위로 씰룩거리더니 짧은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수국차는 원래 그런 맛이 나요. 원래 그런 단 맛이 나는 차에요."
"맛있네요. 고마워요."
"주무시고 가시나요? 그럼 다락방을 좀 치워야 해서요."
다락방을 가리키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니 까만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염색을 해놓은 것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집이 바로 옆인데요."
"요새 시골집으로 들어오는 좀도둑이 기승이라 할머니 대문은 제가 잠가드려요. 초저녁이면 주무시고 자꾸 깜빡하셔서, 제가 말씀드리니 알았다하시며.."
"그럼 열쇠를 주세요, 제가.."
그녀가 식탁에 앉아 있다, 거실 서랍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열쇠를 찾는 그녀의 등으로 시선이 갔다.
칠흑같은 머리카락 밑으로 뒷목이 새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여기요, 집에 가시는 날, 다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