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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Jun 05. 2019

무얼 하기보다 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

폐끼치지 않는 삶

여태껏 내가 함께 일한 사람 중 글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은 ‘권 선배’였다. 그는 보도자료 기사조차 문장에 많은 공을 많이 들였고 그의 기사 첫 문장은 두세 번 읽어볼 가치가 있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뭐랄까 기자보다는 문장가 같았다. 그는 글만 잘 쓰는 게 아니었다. 시간만 있으면 어떤 사물이든 똑같이 그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걸로 허세를 부릴 사람은 아니니 아마 사실일 거다. 그는 미대를 갈 생각도 있었지만 공부도 잘했기에 그냥 공부를 했을 뿐이라고 다.


같은 팀 선배였던 그를 내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의 좌우명 때문이다. 어쩌다 서로의 좌우명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 내 좌우명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였다. 상투적인 문구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면 그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한다고 했다. 뭐지? 이런 걸 좌우명으로 쓰는 사람은 나는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좌우명이라 함은 자신을 채찍질해 발전시키기 위한 동기 부여 문구 정도로 정하는 게 다반사이거늘 그의 좌우명은 ‘내’가 아닌 ‘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에게 부연 설명을 부탁했다. 그는 대략 이런 설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민폐이며 자신 또한 그렇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며 산다. 그뿐이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한 개인의 가치관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당시에는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면서 그의 좌우명을 마주할 때가 생각보다 많다. 요즘 더욱 그렇다. 얼마 전 아이들과 쇼핑몰에 나들이 갔을 때 일이다. 마침 곧 인형극이 시작되려던 참이다. 진행요원은 온 순서대로 아이들을 자리에 앉혔다. 일찍 온 우리 아이들은 맨 앞자리에 앉았다. 인형극 시작까지는 20분 남짓. 앉아서 기다리는 게 지루하다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있는데 공연 시작을 몇 분 앞두고 한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맨 앞자리에 앉히는 거다. 여태 지루함을 감내하며 기다린 다른 아이들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마디 하려다 일단 참기로 했다. 그래도 공연이 재미있는지 아이는 숨이 넘어가게 웃어댔다.


중간쯤 되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그러면 진행요원이 아이를 앉도록 하거나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곤 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는 앉으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지 계속 서서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진행요원은 아이 엄마를 불렀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 아이를 무리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러자 그제야 내 옆에 서 있던 여성이 그 아이의 엄마라며 나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우리 아이가 안 보여서 그러잖아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진행요원은 “그래도 뒤 아이들이 안 보이니 중간에서 서있으면 안 된다”라고 설명했지만 아이가 안 보이는데 그럼 어떻게 하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듣고 있던 나까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이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따위는 개나 줘버린 걸까? 당연한 것을 설명해야 하고 그 설명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은 나의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몇달 전 노키즈존에 대한 전이수 작가의 글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아이는 들어갈 수 없는 식당 때문에 속상했을 아이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식당 주인만을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곳을 노키즈존으로 만든 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 때문일 테니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게 배려라면 타인에 폐를 끼치지 않는 일은 배려의 일부분쯤 될 것 같다.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배려에 비해 일차원적이고 소극적인 느낌도 든다. 하지만 배려는 차치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전이수 작가의 인스타그램 캡처 화면.


음식점에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내 아이를 신경 쓰는 일,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을 위해 쓰레기를 되가져 오는 일, 다음 사람을 위해 도서관의 책은 깨끗하게 읽고 반납하는 일 등 당연하지만 지켜지지 않는 일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선배의 좌우명이 공동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뒤늦게 절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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