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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Apr 09. 2020

아이가 장기하 노래를 부르면  생기는 일

그건 니 생각이고

내가 요즘 장기하 노래를 좀 많이 듣긴 했다. 그렇다고 장기하 노래만 들었던 건 아닌데, 아이가 요즘 부쩍 더 장기하 노래를 많이 부른다. 요 며칠은 이렇게 아침을 시작했다.


“오케이 구글! 장기하 노래 틀어줘”.


그의 대표곡인 ‘싸구려 커피’가 흘러나온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쓱 지나가도

무거운 내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에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일곱 살이 부르기에 적당한 노래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하루 종일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창법도 제법 장기하 같다. 장기하에게 조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전국에서 이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일곱 살은 아마 우리 집 첫째 아들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먀는.


출처 -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


그렇다고 아이가 별다른 음악적 취향을 가진 건 아니다. 아이는 ‘헬로 카봇’, ‘포켓몬스터’ 등 좋아하는 만화 주제곡을 즐겨 부르는 평범한 일곱 살이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나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가 흘러나오면 몸이 먼저 움직인다. 21세기 유치원생이 부른다고 믿을 수 없는 20세기 동요 중 하나인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도 아이의 레퍼토리 중 하나다. 거기에 우리 부부가 즐겨 듣는 노래가 추가된 정도다.


올해 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 하원 차량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새해 복’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곡의 후렴구 가사는 대략 이렇다.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 해야지 (안돼) 노력을 해야지 (안돼)”


아이는 좋아하는 노래라며 하원 차량 선생님께 장기하 좋아하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이 노래 유명한 노래인데 모르냐고도 했단다. 보통 아이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할 텐데, 우리 아이는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해야지 노력을 해야지”이러고 있다. 선생님은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아이가 좋아하는 장기하 노래가 또 있다. ‘쌀밥’이라는 곡이다. 아이가 명란젓을 좋아하는데(보통의 아이는 명란 젓을 좋아하지 않는다) 짜니까 조금씩 먹으라는 의미로 남편이 처음 들려주었는데 그 노래가 재미있었나 보다. 즐겨 듣던 노래는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됐다. 이제는 4세 아들까지 가세해서 합창을 한다.


“멸치볶음 간고등어조림 참기름을 바른 김구이 명란젓 창란젓 오징어젓갈에다 살이 꽉 찬 간장게장 너무 짜 짭짭짜잡짭짭짜잡 너무 짜 짭짭짜잡짭짭짜잡” –‘쌀밥’ 가사 중-


아이는 구글홈으로 장기하 노래를 듣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오면 그 노래를 계속 틀어 달라고 한다. 어떤 날은 ‘그건 니 생각이고’에 꽂혀서 계속 이 노래만 들었다. 그날 저녁, 씻으러 가자는 아빠의 말에 아이는 노래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건 니 생각이고~” 남편과 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사실 이 노래 가사는 대단하다 할 만하다.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그냥 거기 있으니까 가는 거야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야

내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니가 나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걔네가 너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아니면 니가 걔네로 살아 봤냐 아니잖아 …… 중략

그건 니 생각이고. 아니~ 그건 니 생각이고. 아니~ 그건 니 생각이고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마는

그건 니 생각이고 니 생각이고 니 생각이고”


장기하는 가사를 정말 잘 쓴다. 그의 앨범을 들으며 축복받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의 노래 가사를 곱씹으며 주옥같다는 생각도 참 많이 했다. 그는 가사에 영어를 쓰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싸구려 커피’가 처음 나왔을 때의 그 신선한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뭐 하나 꼽을 수 없을 만큼 그의 앨범은 낼 때마다 충분히 훌륭했다. ‘새해 복’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남들 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얘기할 때 그것만으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그의 패기와 발상이 부러웠다.


‘그건 니 생각이고’, ‘새해 복만으로는 안돼. 니가 잘해야지’ 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부르기엔 좀 시니컬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는 아이가 장기가 노래의 가사처럼 생각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다른 사람의 말에 ‘뭔 말인지 알겠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그건 니 생각이고' 중에서-)’라고 말하며 상처 받지 않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아무리 눈앞이 어두워져도 내키지 않으면 거절할 거야(-'거절할 거야' 중에서-)'라고 할 수 있는 단단한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출처 :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 인스타그램


‘새해 복’을 바라기 보단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 “나는 산울림을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중에서-)”라며 다른 사람의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남들 다 뛰어갈 때 "죽을만큼 뛰다가는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마리도 못보고 지나치겠네. 우리는 느리게 걷자(-'느리게 걷자' 중에서-)”고 얘기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듣는 음악은 그 사람의 배경을 채운다고 믿는다. 지금은 아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고 따라 부르는 것 같긴 하지만, 이 노래의 뜻을 알게 될 때엔 아이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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