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음악 그리고 사람 >
밖은 벌써 깜깜하고 거리엔 지나 다니는 사람들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이제 8시다. 한국에서는 늦은 시각도 아닌데 사람들은 일찌감치 집으로들 들어갔나보다.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장 번화한 시청광장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곳을 찾아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의 1층이었다. 벽 선반에는 옛날 시그나기 사진과 그림이 놓여 있고, 벽 한쪽에는 피아노와 사모바르가 놓여 있었다. 그냥 소박하게 꾸며진 작은 식당이었다.
바베큐치킨과 샐러드 그리고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여기서는 어디서든 글라스 와인을 주문할 수 있어서 좋다.
“사페라비?” 하고 식당 주인이 되물었다.
“네.”
사페라비는 카헤티 지방에서 재배되는 포도품종으로 카헤티지방의 레드와인은 모두 사페라비로 담그기 때문에, 여기서 사페라비는 곧레드와인을 말한다.
좁은 식당 안에 식당 여주인과 단 둘만 있으니 조금 어색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하고 식당 여주인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전 한국에서 왔어요. 조지아에 온 지는 나흘 째고, 시그나기에는 오늘 왔어요.”
“식당을 하신 지는 오래 되셨나요?”
“얼마 안되었어요. 원래는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그쪽 일을 하다가, 어찌 하다가 식당을 하게 되었어요. 남편이랑 같이요. 남편도 옛날에는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책도 썼었는데. 이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살던 집인데, 개조해서 식당과 게스트하우스를 같이 하고 있어요.”
“게스트하우스요?”
“네. 저쪽예요.식사 끝나면 구경시켜 줄게요,원한다면.”
“카헤티 지방의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황금사자상이 발견되었지요. 그래서 식당 이름도 ‘골든라이언’이라고 지었어요”
그녀는 한꺼번에 많은 말을 쏟아 내더니 급기야는 주방에 있던 남편까지 불러내서 인사를 시켰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어색해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우즈벡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집 안의 있던 아버지를 불러 인사를 시키는 통에 꽤나 난감했었던 기억.
남편이 주방쪽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자신이 늘 지니고 다닌다는 ‘골든라이언’ 열쇠 고리를 보여주었다. 사자상의 칠은 다 까졌고 고리부분과도 색깔도 다른 것을 보니 오래도록 지니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때는 그녀의 행동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골든라이언에 대한 애정을. 나중에 보니 이 골든라이온은 카헤티 지방의 고대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나온 유물인데 꽤나 오래된 것으로 카헤티 지역의 문화 수준을 짐작케 하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었던 것이다. 조지아 화폐에도 등장할 정도로 귀한 유물이었던 것. 이 골든라이언은 시그나기 박물관 1층 전시장 입구쪽에 아주 귀하게 모셔져 있다.
“내 이름은 니노예요. 성녀 니노의 이름을 따서 지었죠. 성녀니노는 포도나무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묶어 십자가를 만들었어요. 내 친구가 나에게 포도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어요. 이것 봐요.”
하면서 자기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성녀 니노’와 ‘포도나무 십자가’ 그리고‘골든 라이언’은 시그나기를 표현하는 키워드였다.
“사페라비에 긴장감 풀려 나가”
주문한 음식들과 와인이 나왔다. 야채와 치즈, 올리브유를 넣고 만든 그리스식 샐러드와 구운 감자가 곁들여진 바베큐치킨요리, 그리고 사페라비가 차례로 테이블에 올려졌다. 니노가 테이블 위에 초에 불을 밝혔다. 초불 하나로 식당이 근사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으로 변했다.
촛불아래서 사페라비의 짙은 루비색이 도발적으로 빛났다. 한 모금 마셔보았다. 향과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풍부했다. 적당한 온도의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듯한 기분이랄까. 순식간에 나른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여태껏 마신 조지아 와인 중에 제일 좋았다.
순식간에 첫 잔을 비우고, 두 번째 사페라비를 주문했다.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긴장이 풀려나갔다. 트빌리시에서의 택시기사와의 실랑이, 호텔 찾아 한 시간 넘게 시그나기 골목길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닌 일, 알라자니 평원과 코카서스 산맥에서 받은 감동, 성벽 위의 거센 바람도 모두 와인 속으로 사라졌다. 기분이 살짝 업 되었다. 얼굴도 살짝 상기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샐러드와 바베큐 맛은 아무래도 좋았다.
주방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조지아 노래를 듣고 싶다했더니 니노가 틀었나보다.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어두운 레스토랑을 꽉 채웠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이 슬픈 느낌은 무얼까'.
광활한 들판, 말발굽소리, 휘몰아치는 바람, 흙먼지, 비장한 병사의 모습, 그들의 맨 앞줄에 선 장수의 모습, 펄럭이는 군장들, 햇빛에 반짝이는 창 끝, 지친 병사의 표정들,- 노래를 듣는 동안 내 머리 속에 떠 다녔던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매우 용감한 사람들이지.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는 없지.
인생은 매우 짧고 덧없는 것
그러니 우리는 용감하게 살아야 해.
니노가 설명해 준 노래 내용이다. 주변 강대국과 타민족들의 틈새 속에서 전쟁과 죽음이라는 숙명에 굴하지 말고 용기있게 맞서자는 내용일까. 제목과 가수이름을 물어보았지만 그녀도 모른다고 했다. 아주 오래된 노래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라고 했다. 조지아의 구전가요인 셈이다.
조지아 민요는 정말 듣고 싶었는데 이렇게 현지인의 설명과 함께 들을 수 있다니… 뜻하지 않게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번엔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황갈색 와인이 나왔다. 조지아의 화이트 와인은 다른 나라의 화이트와인과 달리 '호박색'을 띤다. 나무의 수지가 땅 속에서 5천만 년의 시간 동안 굳어져서 생긴 호박석(Amber, Янтарь)의 투명한 황갈색과 닮아 호박색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인들은 황갈색 호박석을 호랑이의 혼이 굳어진 보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인지 조지아의 화이트와인은 어쩐지 신비스럽고 혼이 담겨져 있는 듯했다.
한 모금 마셔 보았다. 가벼우면서도 묵직했고, 쌉싸하면서도 달콤했다. 눈을 뜨게 하는 톡 쏘는 맛도 느껴졌다. 한 마디로 오묘했다. 마치 인간사 모든 희노애락이 녹아있는 듯 했다.
한국에서 와인은 칠레산 테이블 와인 밖에 마셔본 적이 없는데 마치 전문가인 양 말하고 있는 내가 웃겼다. 하여간 난 조지아 와인에 푹 빠졌다.
남자 두 명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트빌리시에 사는데 시그나기에서 포도를 재배한다고 했다.
“조지아 와인이 맛이 좋은 이유는 포도가 스스로 향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예요”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와인에 있어서 포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조지아 와인은, 와인 그 이상입니다. 단순한 술이 아니예요” 또 다른 사람이 말했다.
두 사람에게 와인은 단순히 술이 아닌 자신들의 삶의 철학이 담긴 '고귀한 무엇'이었다. 와인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무척 진지했다.
“한국에도 조지아 와인이 수입되는데, 혹시 아세요? ”
“아니 처음 듣는 얘긴데요. ”
“소량이긴 하지만 몇 개 브랜드가 유통되고 있어요. 조지아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어요. 나중에 좋은 와인 만들면 한국으로도 수출하세요."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되고 각자 먹는 일에 집중하였다.
밤9시 30분이 넘었는데도 손님들이 계속 들어왔다. 니노에게 영업시간을 물으니 ‘손님이 있을 때까지’ 라는 답이 돌아왔다. 영업시간 끝났다고 쫒기듯 식당문을 나섰던 기억이 여러 차례 있었기에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있다면 문을 연다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내가 식당 문을 나설 때까지도 골든 라이언은 손님들의 얘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우연히 들어간 ‘골든 라이언’에서의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은 참으로 특별하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코카서스의 ‘시그나기’라는 작은 요새마을, 2백 년도 더 된 오래된 집, 그 집을 개조해서 만든 레스토랑, 레스토랑의 희미한 불빛, 주인여자의 포도나무 십자가, 조지아를 상징하는 ‘황금 라이언’, 우연히 만난 포도업자들, 시그나기 사람들과 주고 받은 이야기들, 깜깜한 골목길…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꿈 속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기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