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나기가 왜 사랑의 도시인 줄 아세요?">
조지아 관광청은 물론이고 조지아 현지 여행사, 국내 여행사, 전 세계의 여행 블로거들 모두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로 부른다. 그런데 어디서도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라 부르는 정확한 근거가 설명되어 있지 않다. 단순한 상업적 홍보 문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나 나름대로 그 근거를 찾아보기로 했다. 찾았다기 보단 근거로 제시된 여러 얘기들을 모아 보았다.
카즈베기 계곡에 숨겨진 하트모양의 ‘사랑의 호수’를 둘러 보고 내려 오는데 운전기사가 묻는다.
“왜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라고 부르는 줄 아세요?”
“글쎄요.”
“시그나기의 지형이 하트모양이예요. 좀 전에 본 호수처럼.”,
“에이, 설마요? ”
“진짜라니까요.”
시그나기의 지형이 하트모양이란 얘긴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사랑의 도시’라 부를만 하다고 생각했다. 땅 모양이 ‘심장(하트)’모양인 것을 알아본 것도, 그래서 ‘사랑의 도시’라는 예쁜 별칭으로 부르는 사람들의 센스도 놀라울 뿐이다.
확인을 위해 구글맵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아무리봐도 하트를 찾을 수가 없다. 위성사진으로 보았는데도 마찬가지다. 조지아 여행 이후 줄곧 시그나기는 하트모양으로 생긴 도시라고 믿고 있었는데. 실망스러웠다.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아 이리저리 검색을 해 보았다. 단서를 찾기 위해서. 그런데 현지인의 말을 뒷받침해 줄만 글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시그나기의 지형이 러시아어 알파벳 < Г > 모양으로 생겼다는 글을 발견했을 뿐이다.
쉰 살이 넘은 조지아 현지인의 말이 잘못된 것일까. 어떤 이유인지 그 현지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명한 하트모양의 시그나기가 그려져 있는 지도를 한 블로그의 글에서 발견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하트모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냥 하트라고 믿으련다.
'시그나기에서는 24시간 혼인신고'가 가능하다. 시그나기에서는 출생, 혼인, 이혼, 입양, 사망 신고 등을 하는 관청(러시아어로는 '작스ЗАГС(Записи Актов Гражданского Состояния)'이 24시간 일을 한다. 때문에 하루 24시간 중 원하는 시간에, 심지어는 새벽 시간에도 결혼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갖춰야 할 서류나 절차도 매우 간단하다. 한 시간 전에 전화 등을 통해 결혼 발급서 신청을 예약하고, 필요서류(여권, 외국인인 경우 공증받은 조지아어로 번역본)와 두 명의 증인과 함께 방문하면 된다 (수수료는 평일 90라리, 휴일 150라리이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실제로 많은 젊은 연인들, 여행지에서 만난 국적이 다른 연인들- 이 시그나기에 와서 결혼식을 올린다. 최근에는 신혼 여행과 결혼을 팩키지 상품으로 묶은 여행사의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근사한 레스토랑, 아름다운 교회, 결혼축하연과 신혼여행, 결혼 신고, 증명서 발급까지 신혼여행까지 여행사가 척척 알아서 진행해 준다.
저렴한 비용으로 신혼여행과 조금 특별한 결혼을 꿈꾸는 연인들은 시그나기로 떠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임이 틀림없다.
한 화가가 있었네.
그에게는 집과 캔버스도 있었지.
그런데 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을 팔았네.
그림과 피도 팔았네.
그리고 모든 돈으로
바다도 덮을 만큼 꽃을 사들였지.
러시아 가요 ‘백만송이 장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사랑하는 여인에게 백만송이의 장미를 선물했지만, 여인은 화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멀리 떠나버린다는 슬픈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트비아곡에 러시아의 음유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가 가사를 만들고 알라 푸가초바가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래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화가가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라고 알려지면서, 그가 태어난 도시 시그나기는 ‘지고지순, 순수한 사랑’의 성지가 되었다.
방문객들은 마을 초입에 세워진 피로스마니의 작품 <당나귀를 탄 남자>동상을 보는 순간 저절로 피로스마니와 그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피로스마니의 이름을 딴 호텔과 와인, 시그나기 박물관의 피로스마니 전시관, 벽에 붙은 피로스마니의 그림 등 시그나기에는 피로스마니와 관련된 물건과 장소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피로스마니의 사랑 얘기는 완전한 허구다. 그의 고향은 시그나기가 아니라 40킬로 떨어진 카헤티의 변방 '미르자니'라는 마을이다. 그곳에는 피로스마니의 박물관과 오리지날 작품 14점이 소장되어 있다.
피로스마니의 연구가들은 피로스마니에게 ‘백만송이 장미’에 나오는 그런 사랑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어째서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퍼져나가는지 의아할 뿐이라고 설명한다.
아무 근거 없는 ‘피로스나미의 비극적인 사랑’얘기는 현대인의 ‘지순한 사랑에 대한 갈망’과 버무려져 다양한 버전으로 업데이트되고, 그럴듯한 디테일이 보태져 완전한 구조를 갖춘 스토리로 진화하고 있다.
아무리 그의 고향이 시그나기가 아니라고, 그는 그런 사랑을 한 적이 없다고 외쳐봐도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왜냐면 대중들은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자 하는 성향이 다분하므로.
앞으로도 피로스마니의 비극적인 사랑은 ‘백만송이의 장미’로 피어날 것이다. 피로스나미의 고향이 시그나기가 아니라는 사실도 ‘백만송이의 장미’에 묻힌 채 말이다.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로 불리게 된 다른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심성이 악하고 잔인한 시그나기 사람들은 늘 악행을 일삼았다. 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을 벌하게 위해 천사를 내려보냈다. 마을에 내려온 천사는 신의 뜻과 달리 자신의 심장을 조각조각 떼내어 집집마다 놓아두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차오르고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심장을 나눠준 천사는 생명을 다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신은 시그나기 사람들을 용서하고, 천사를 부활시켜 시그나기가 영원히 사랑과 선이 넘치는 마을이 되도록 잘 지키라고 하였다.
천사의 심장을 가진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임을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천사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의 도시’전설이 가장 마음에 든다.
실제로 시그나기에서 만난 사람들은 늘 웃음과 친절이 넘쳐났다.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서, 어떤 이유로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앞으로도 알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여기 열거된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들이 새롭게 생겨날 수도 있다.
모두 좋다. 어쨌든 새로운 이유들 역시 사랑에 관한 얘기들일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라는 것이다. 그러니 시그나기에 가거들랑 맘껏 사랑만 하다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