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호기롭게 향했던 영국은 낯설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살 곳은 아니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드문드문 내리는 비는 낭만이 가득했고, 유학원 등하굣길 3-4시간도 바깥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어요. 생각 외로 외국물이나 음식이 저랑 너무 잘 맞더라고요. 한국 돌아와서 몸무게를 재봤을 때는 10킬로 이상 쪘어요. 배고프거나 아파서 골골거리는 일은 전혀 없었던 거죠.
친구들을 사귀는 일도 어렵지는 않았어요. 다들 외국에서 한 지역으로 모였고, 캐임브리지라는 작은 도시에서 똘똘 뭉쳐서 수업을 듣는 저희는 깊게 친해지지 않더라도 이름 정도, 같이 밥 먹는 정도, 집에 초대해서 노는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며 두루두루 모여서 놀곤 했어요. 누군가가 생일 파티에 초대해서 가기도, 밤새 클럽에서 놀아보기도, 그리고 에어비엔비에 하루 묵으면서 술파티를 하기도 하면서 점차 적응해 갔어요.
그렇게 한 2-3개월은 보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스무 살의 저는 대입을 포기하고 한국의 친구들과는 다르게 영국에서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물들여지는 거 같았어요.
그런데, 한국의 반대쪽에 있으니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외로움이나, 적응이 되고 나니 보이는 불편함들이 저를 조금씩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홈스테이 하는 아주머니께서 한국을 그렇게 미워하시니, 저는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시간에 몸 둘 바를 모르던 때가 꽤나 있었고, 저의 착각이었을지 몰라도 왜인지 한국인인 저를 미워하는 거 같았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요, 한 명은 홈스테이 하시는 할아버지셨고, 한 명은 유학원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저를 은근히 미워하는 할머니 대신 따뜻하게 저를 맞이해 주셨고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한국인 언니는 제 사정을 아니까, 저에게 방 옮기기를 추천했습니다.
처음에는 바깥세상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던 왕복 3-4시간의 등하교 시간이 저주와 같아질 무렵에는 방을 옮겼습니다. 유학원과 조금 더 가까운 홈스테이였는데, 한국인 언니가 떠나기 2주 정도 남은 시점에서 잠깐 같이 머물게 되었어요. 언니가 한국으로 떠나고, 저는 그때부터 약간의 슬럼프에 빠지게 됩니다. 딱 대학교 지원하는 시기여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든 시기였어요. 언니가 떠난 자리에는 어떤 거대한 멕시코 여성이 들어왔고, 그 룸메이트와 너무 맞지 않아서 겹치고 겹쳐서 지쳐 있는 제가 보이더라고요.
주변에 아무도 없지는 않았어요. 매일 같이 연락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고, 늘 저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나약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새로운 도전이 뭐라고. 도전이 무서워서 수능을 치지 않았고, 영국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하니 또 지레 겁먹은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렇게 한국행을 결정하게 됩니다. 도전 앞에서 무너진 제가 참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도전을 실패하는 게 더 두려웠던 거 같아요. 4개월의 영국생활이 인생에 있어서 큰 값어치를 주겠거니 생각하면서 가족들이 있는 한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살, 봄이었어요.
24살의 제가 20살의 저를 돌이켜 보면, 물론 그 시절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겠지만,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20살의 저는 24살의 제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라고 있겠지만요. 후자가 더 맞겠죠. 지금도 도전을 무서워하고 벌벌 떨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가끔 자책하기도 하고 유학을 중도 포기하고 돌아온 저를 후회하기도 하지만, 몇십 년 후에 돌이켜 보면 다 잘했고,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주고 있을 제가 눈에 훤해요.
잘하고 있다, 잘 해냈다.
하루 만에 포기한 유학생활이지만, 그 속에서 저는 여러 가지 삶의 단상을 보았고, 도망치듯 떠난 곳에 유토피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4년 후,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나도 모르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욕망이 끓고 있었나 봅니다. 이제는 조금 목표가 달라졌어요. 평범한 일상도 감사하게 여기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니까 특별하고 유별나게 살아야 한다는 목표 말고, 이번 생이 마지막이니 이런 평온하고 행복한 일상을 감사하게 여기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