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했던 강명희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이 도착했다.
<잔치국수, 분천, 어린 농부>
이 책이 출산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무척 반가웠다.
일단 책이 잘 팔려야 작가도 신이 날 텐데 워낙 책을 잘 읽지 않는 시대이니 살짝 걱정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은 꼭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 생각을 공유해본다.
이 책은 잔치국수, 분천, 어린 농부 세 편의 중편소설이다.
중편이라는 분량이 부담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잔치국수> 중편 안에 뒤셀도르프 정오열차,잔치국수,페어드 세 편의 연작소설이 짤막한 단편처럼 들어있어 그중 한 편만 읽어도 완성되지만 책을 들었다면 다 읽을 때까지 놓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강명희 소설의 매력은 책 속으로 몰입하게 되는 흡인력에 있다.
먼저 <어린 농부>부터 얘기해야겠다.
책 제목에서 맨 뒤에 있지만 이 소설이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다.
이 소설에 대한 에피소드를 얘기하자면 김승옥 선생님을 빠트릴 수 없다.
약 30년 전, 김승옥 선생님의 소설 쓰기 강좌에서 작가가 처음으로 이 소설을 써냈는데 선생님이 보시고는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참 겉멋이 들어있던 문청 아줌마들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루키 등 세련된 문체와 소재를 흉내 내던 강남의 자유부인들로선 촌스럽기까지 한 이런 담백한 소설이 대가의 눈에 들었다니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책으로 나온 어린 농부를 읽다 보니 김승옥 선생님의 안목이 정확했다는 걸 알겠다.
당시엔 등단도 하지 않은 작가의 이 소설을 장편으로 만들어 책을 내라고 독려하셨는데
서점 운영으로 바쁜 작가가 차일피일 미루다가
적극적으로 밀어주시던 김승옥 선생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시면서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 영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책으로 묶여 나오게 되었으니 한참 늦은 감이 있는데도 작품이 늙질 않았다.
옛날에 쓴 소설들이 세월과 함께 늙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 자체가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어서인지 오히려 현시점에서 생각할 바를 만들어 준다.
작가의 일가친척들이 집안 얘기 쓰지 말라고 했다는데 작가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조금씩 양념처럼 써먹던 얘기라 그런지 익숙하기도 하고 그 완성본을 보는 느낌이다.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들어간 집에서 온갖 고생 끝에 소작농 수혜까지 받은 할아버지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후손들로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집안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은 작가로서는 쓰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소설 속의 그 어린 농부가 할아버지가 되어 어린 손녀 하나를 붙잡고 자분자분 털어놓는 광경을 떠올려 본다.
<분천>은 현재 농사를 짓고 있는 작가의 주소지 이기도 한데 강원도 분천이라는 곳과 연결해 같은 이름을 가진 지역을 묘한 인연으로 엮어 소설가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의 재미를 극대화 한 작품이다.
갑자기 어린 딸을 잃고 견디기 힘들었던 부부가 수십 년을 헤어져 살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낸 <분천>은 우연과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딸의 친한 친구 윤희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딸의 곁으로 보내려고 저수지로 끌고 간다.
어쩐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윤희가 도망을 가고,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행동에 놀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분천 마을을 떠난다.
그런데 무작정 분천을 떠나 달려서 어느 장소에 도착했는데 이 마을 이름도 분천이란다.
경기도 분천에서 문양이라는 이름의 딸을 얻고 잃었는데
강원도 분천으로 숨어 들어가서 문 씨라는 죽은 남자를 대신해 그 과부와 살며 딸을 낳자 양이라는 이름을 지어 문양이로 만든다.
경기도 분천에서 평생 남편을 기다리며 집안을 일으킨 여자가 보고 기절할 만도 했겠다.
<잔치국수>는 작가가 가장 최근에 쓴 소설이다.
작가는 지난봄 독일에 열흘간 머물면서 소재를 들고 왔는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후딱 세 편을 연작으로 써내더니
가을인 지금 책으로 묶어 냈다.
<잔치 국수>는 시나리오를 공부한 작가의 내공이 보이는 소설이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영상으로 떠올라 그 장면이 보이는 것 같다.
작품의 무대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독일 마을인데도 말이다.
독일, 하면 우리 세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튼튼하고 품질 좋은 물건을 만들었던 선진국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떠올린다.
6,70년대 가난했던 우리나라 청년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외화벌이를 떠났던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그 유명한 장면이 이 작품 속에도 나오는데 작품 속 인물을 통하니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전에 여러 기사에서 봤을 때는 박정희를 미화시키는 관점으로만 봤기에 시큰둥했었는데 말이다.
작품 속 분자는 글자를 쓸 수도 잘 읽지도 못하면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독일까지 가서 간호사로 성공하는데 그 이야기도 책을 읽어보면 이해가 되고 재미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강명희 작가는 직접적이든 간접으로든 자신의 체험이 들어가 녹아있어 꽤나 사실적이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잔치국수>는 순전히 이야기를 전해 듣고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제까지 작가 특유의 향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면서도 역시나 작가 특유의 따스한 인간미가 들어있다.
이 책을 내려놓으면서 느끼는 것은
강명희 작가의 어린 농부流를 떠나보내고 잔치국수 류流를 시작되면서 강명희 작가의 또 다른 챕터가 열리는 기분이다.
작가의 변화가 다음에는 어떤 작품으로 나올지 벌써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