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스미 구찌베니
아침 일찍 외출할 일이 있어서 머리를 감는 등 준비를 했다.
엄마가 주간보호센터에 가시는 시간과 맞물리다 보니 바쁜 아침이 되었는데,
이럴 때는 내가 먼저 외출 준비를 끝내야 한다.
엄마 먼저 준비시켰다가는 옷을 모두 엉망으로 바꿔 입기 때문에
정작 나설 때가 되면 다시 옷을 입혀 드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제대로 옷을 입혀 드렸건만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바지 위에 속옷을 입고 다른 바지 하나를 더 입는다던지
티셔츠 위에 내복을 껴입고 점퍼를 입어서
밖에 나가 차를 타기 직전에 발견하고는 난감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는 외출 준비하는 나를 졸졸 따라 다니신다.
머리 감으면 당신도 머리 감겠다고 욕실에 들어오고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면 똑같이 발라달라고 조르신다.
마지막으로 립스틱을 바를 때도 마찬가지다.
- 나도 구찌베니 발라줘~
할 수 없이 립스틱을 엄마 입술에 발라 드렸다.
입술을 오므려서 쭉 내밀고 있는 엄마 얼굴을 보니
이건 언젠가 우리 모녀 사이에 있었던 장면이다.
상대 역할만 뒤바뀌었을 뿐.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화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코티분을 톡톡 두드릴 때 풍겨나오는 향긋한 내음은 어린 내게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엄마가 화장을 하는 일은 일 년에 몇 번 정도에 지나지 않아서
살림 냄새에 찌든 엄마가 마치 선녀로 변신하는 기분이라 어린 마음에도 흥분되었던 추억이다.
그중에 립스틱을 바르는 마지막 장면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구찌베니 발라 달라고 조르면 엄마가 혼을 내다가도
슬쩍 발라주시곤 했다.
내가 워낙 심하게 조르니까 발라준 건지
아니면 엄마도 오랜만의 화장으로 인해 기분이 업되어 있으니 선심을 쓴 건지
하여간 그럴 때 나도 립스틱을 한 번 발라보곤 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빨간 색깔의 '기스미 립스틱',
아마도 엄마는 평생 동안 그 립스틱 하나만을 쓰셨을 것이다.
내가 결혼할 무렵까지도 엄마의 반짇고리에 들어있었으니까.
당시로선 고급 밀수품이었으니 엄마에겐 전무후무하게 유일한 사치품이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니 빨간색 립스틱은 무척 경제적이다.
엄마가 몇십 년 동안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입술에 점 하나 정도 찍은 다음 손가락으로 입술 전체를 문질러 바를 수 있으니까 가능했다.
경제가 좋지 않으면 저렴하면서도 기분을 달래 주는 립스틱이 잘 팔린다는데
엄마에겐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기스미 립스틱이었다.
오늘 아침 엄마의 입술에 핑크색 립스틱을 발라주면서
잠시 엄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