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엽편소설
치매 엄마를 모시고 있다보니 별별 상상을 다한다.
그 사람들을 처음 만난 것은 다이아몬드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였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평범한 남녀가 내 눈에 뜨인 것은 그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2,30대 젊은 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커피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지만 다정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젊은 커플들이 흉내내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기에 더 시선이 끌렸는지 모르겠다.
집에서 나와 회사 근처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는 딸의 집은, 가끔 와서 청소해주지 않으면 구더기가 나오게 생겼기에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쯤 오고 있다.
처음엔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됐다며 예쁜 가구와 소품들을 사들여서 제법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기도 하고 홀로서기를 즐기던 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석 달 열흘 지나자 예전의 제방 꼬락서니와 똑같아졌다.
처음엔 제집 근처엔 얼씬도 말라고 엄포를 놓았었다. 어느 날 불시에 쳐들어가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져있는 집안을 말끔하게 치워줬더니 딸은 은근슬쩍 비밀번호까지 알려주었다.
저녁 찌개거리를 사기 위해 지하의 마트에 갔다가 예의 그 중년 남녀를 만났다.
슬쩍 그들의 카트를 넘겨다 보니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간식이나 과일 등 안주거리들 뿐이다. 그 나이 대의 장바구니라기보다는 연애를 시작한 연인들의 그것이 분명해 보여, 주부 30년 차인 나는 속으로 의심을 품었다
'저 사람들, 혹시 불륜 아냐?'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는 나한테 딱 걸렸다.
문 앞에서 부둥켜안고 작별의 키스를 하고 있던 그 불륜 남녀들 말이다.
남자는 멋쩍은지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자는 문 뒤로 숨어버렸다.
못 본 척 비밀번호를 누르는 나를 여자가 불러 세웠다.
" 따님 집에 오신 건가요?"
" 그런데요?"
내 말투가 꽤 퉁명스러웠는지 잠깐 당황하는 듯하던 여자가 다시 해맑은 얼굴로 돌아왔다.
" 저희 집에서 잠깐 차 한잔 하시겠어요?"
호기심에 따라 들어간 여자의 집은 역시 내 짐작대로였다.
가구라고는 덩그러니 침대 하나와 조그만 2인용 식탁이 있을 뿐, 그 나이대의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식탁 위 크리스털 화병에 장미꽃까지 '우리는 불륜'이라고 씌여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좀 그래 보이죠?"
여자가 나이에 맞지 않게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세컨드 하우스예요. 우리들의..."
'얼씨구~ '
나는 미혼의 내 딸이 당신들 행태를 보고 배우면 어쩌나 겁이 난다고 한마디 할 타이밍을 잡는 중인데, 여자가 뜻밖의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4년째 모시고 있다고 한다.
처음엔 그동안 좋았던 시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잘 견디었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돈을 훔쳐갔다고 의심하고, 다른 자식들에게 며느리가 자신을 구박한다고 고자질한다.
처음에 자식들은 어머니가 치매이기 때문에 며느리 입장을 잘 헤아려주었다.
그러나 꽤 그럴싸하게 일러바치는 시어머니의 하소연에,
올케가, 형수가 자기 엄마를 구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작은 시누이가 큰 맘 먹고 언니 하루 쉬라며 시어머니를 모셔갔다.
여자는 오랜만에 휴가를 얻어 다리를 쭉 뻗고 쉬고 있는데
시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엄마 아침밥 드렸어요?"
"그럼요."
"엄마는 아침에 아무것도 안 드셨다는데요?"
"원래 그러세요. 금방 드시고도 안 드셨다고 하세요."
"그래요? 뭐 뭐 드셨는데요?"
"...."
아침에 드린 반찬 이름을 대보라는 시누이의 목소리에는 다분히 감정이 실려있었다.
갑자기 물어보는 바람에 대답을 못하고 잠시 생각하던 여자는 시누이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오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치매 엄마를 대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걸 인정하는 데까지 시일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동안 여자는 우울증에 걸렸다.
동생들이 서둘러서 낮시간 동안 치매노인을 돌봐주는 주간보호센터도 알아봐주었지만
여자의 우울증은 깊어갔다.
이제 형제들은 엄마가 자기 집으로 올까 봐 전전긍긍했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치매 4등급을 받은 시어머니는 아침 9시가 되면 데이케어센터에 갔다가 저녁 6시면 돌아온다.
여자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시어머니를 보내 놓고 똥 묻은 옷을 빨던 여자가 갑자기 베란다로 나가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그날이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죽음밖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남편은 이혼 대신에 별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이 다이아몬드 오피스텔로 이사 온 것이다.
"그럼 시어머니는 어떻게 되셨나요? "
내가 묻자 여자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저녁 6시면 어머님이 계시는 집으로 출근해요. 거기서 자고 다음날 아침 9시에 데이케어센터에 보내드리고 퇴근하는 거죠."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는 여자의 손가락 끝에서 빨간색 매니큐어가 반짝 빛났다.
똥기저귀와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