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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Jun 12. 2016

백일장 게임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듣던 문청 아줌마 시절, 어디에든 내가 쓴 글이 게재된다는 건 가슴 뛰는 일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의 독자란에 글을 보내서 채택이 되면 소정의 원고료까지 받을 수 있으니 나 같은 문청 아줌마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묻어나오는 주부들의 소소하고 생생한 이야기들이 신문 잡지에서는 필요했고, 전업주부인 우리는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다가 짭짤한 부업?거리까지 되었기에 서로에게 좋았던 셈이다.

당시 살았던 지방신문의 편집기자들과도 안면을 틀 정도로 상생관계가 되었다.  은근 작가 대접을 받는 것도 기분 좋았다.  우리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작가가 아니었던가?


가을이 되면 문청 아줌마들은 더욱 바빠진다.

한글날 기념행사로 여기저기서 주부백일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백일장 장소에 가면 낯익은 문청아줌마들을 만나게 된다.  서로 인사는 없었지만, 저이는 작년 백화점 백일장에서 장원을 먹은 사람이고, 저이는 모 방송 신춘편지쇼에서  대상을 차지한 사람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백화점 장원을 했던 사람은 작년에 시 부문으로 상을 받았으니 올해는 산문 부문에 도전할 것이고,  방송 편지쇼에서 대상 받은 저 사람은 시 부문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고 함께 간 우리 센터 회원끼리 정보도 주고받는 등 백일장 분위기가 점점 고조된다.

시제가 발표되면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처음엔 멋모르고 그늘만 피해 돗자리 깔고 앉아 불편한 자세로 글을 썼는데, 몇 해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겨 가까운 커피숍을 찾아 글 쓰는데 쾌적한 분위기부터 조성했다.

이제 오늘의 시제가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과  얼마나 잘 맞느냐가 관건인데  몇 년 차 백일장 경력이 쌓이다 보니 크게 욕심 부리지 않는다면 시제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초보들이야 시제의 한계에 갇혀 새로 쓰느라 끙끙거리지만 우리처럼 노련한 문청아줌마들은 오늘을 대비해 그동안 써두었던 원고들을 꺼내  오늘의 시제와 가장 잘 맞는 작품을 고른다.

그리고 다듬는다.  최대한 오늘의 시제에 맞추는 작업인데  똑같은 이야기라도 관점을 달리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문장을 다듬는다. 글에서 문장은 기본이다.  틀린 맞춤법이나 비문이 들어가면 아무리 좋은 스토리라도 심사위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문청아줌마들이다.

백일장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글을 써낸 당일 그 자리에서  수상자를 발표한다는 것일 게다.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며 수다 떨다 보면 결과가 나오고 상금까지 챙겨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어지간하면 우리 회원들 거의가 상장 하나씩 챙겨 들고 돌아왔다. 문화센터 강의가 특별하게 좋았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글쓰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강사에 따라 부쩍 실력이 향상되었다 싶은 센터로 몰려가거나 유명 작가를 초빙하기도 했으니 강좌 내용이 중요하긴 했나 보다.

잠깐 옆길로 샌다면, 아무리 유명 작가라 해도 강의가 신통찮은 작가가 있는 반면, 작품도 변변찮은 무명작가지만 후배들에게 알토란 같은 글쓰기 비법을 전수해준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글쓰기는 아무래도 자신만의 내공이 쌓여 이루어지는 기술?인 것 같다


다시 백일장으로 돌아와서,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도시는 산업도시라 그런지 경제적으로 풍족한 곳이었다.  다른 행사와 마찬가지로 백일장도 봄가을로 자주 열렸는데 상금도 꽤 두둑한 편이라  인근 다른 도시의 문청아줌마들이 원정을 왔을 정도였다.

보통 백일장 일정이 잡히면 거의가 겹치는 날이 없어 문청아줌마들에게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오늘은 군에서 개최하는 백일장이 열리고 내일은 어느 은행에서 개최하는 등 일정이 잘 안배되었었는데, 경쟁이 붙었는지 백화점 두 곳에서 한 날 한 시에 백일장이 열린다는 공지가 뜬 것이다. 문청아줌마들은 고민에 빠졌다. 상금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백일장이 열리는 장소의 이동거리가 차로 10분 정도라는 것도 우리를 더 곤혹스럽게 했다.

마음을 비우고 어느 한 곳만 택하기엔 우리는 너무 닳고 닳아 있었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먼저 A백화점을 공략하러 출발했다. 시제가 발표되자 예의 미리 써둔 원고를 고르는 작업부터 한다. 문장을 다듬는 손길이 바쁠 때쯤 B백화점으로 출동했던 팀이  왔다.  시제가 도저히 맞질 않아 포기하고 왔다는 회원을 통해 그쪽 시제를 듣고 보니 엊그제 써둔 시와 딱 맞아떨어진다. (우리 문청아줌마들은 이미 기본적으로 여러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서둘러 작품을 제출하고 B백화점 백일장이 열리는 장소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오늘 시제에 맞는 시를 훑어본다. 이런 때 택시기사가 손님대접 한답시고 날씨라던가 세상 돌아가는 얘기라도 꺼냈다가는 무안 당하기 십상이다.  문청아줌마의 머릿속에는 온통 오늘 오전 안으로 백화점에 바쳐야 할 시가 가득 차 있어 대꾸는커녕 눈길조차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 제출 30분 전에 전장에 도착한 전사는 칼을 빼어 든다.  백일장 도장이 찍혀있는 원고지를 받아 준비해둔 비장의 시를 휘갈겨 본부석에 제출하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아까 A백화점 백일장에서 만났던 모 방송국 편지쇼 대상작가가 그제사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순발력에도 감탄하며 그녀는 어느 부문에 참여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드디어 수상자를 발표하는 시간이 왔다.

아무래도 시간과 정성이 더 들어간 A백화점을 지키기로 해서 그쪽으로 갔는데 저쪽 B백화점 상황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다.

A백화점 올해의 장원은 엉뚱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처음 보는 예쁜 아가씨가 우리 지역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나는 그다음인 차상을 받았는데 지난해 차하였던걸 감안하면 한 등급 올라간 셈이라 만족해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B백화점을 지키고 있던 회원이 달려왔다.  내가 B백화점 백일장에서 제출한 시가 장원으로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달려가 파장 분위기의 잔치에서 관계 집행자들의 눈총과 축하를 함께 받으며 영광의 상을 받아오는 마지막 기지를 발휘한다.

나중에 들었는데 내가 억세게 운이 좋아 두 백화점 백일장의 상을 모두 받을 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먼저 장원을 차지한 다크호스는 인근 도시에서 온 선수였다는 게 밝혀졌다.  선수는 A백화점에서 산문으로 장원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B백화점으로 날아가 나처럼 시를  제출했는데 그 역시 장원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타 지역 사람인 데다가 저쪽 A 백화점 백일장에도 장원으로 올랐다는 정보를 입수한 주최 측에서 탈락시켰다고 한다. 자동적으로 다음 순위인 내가 장원을 차지한 셈이다.  미처 저쪽에서의 차상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던 것.

결국 다크호스 선수는 한 곳의 상금만을 안고 자기 동네로 돌아갔고, 나는 어부지리로 얻은 장원 자리와 함께 두 곳의 상금을 모두 챙긴 행운아가 되었다.

유력한 경쟁상대였던 작년도 장원인 시인은 산문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시 쓰기에 매진해 그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진짜 시인이 되었다.

산문부문에 응모했더라면 장원을 차지할 수 있었을 방송국 편지쇼 작가는 이참에 시를 아예 포기하고 전문 방송작가로 발길을 돌려 아직도 모 방송국에서 활발하게 방송대본을 쓰고 있다.



나는 그다음 해부터 지역에서 열리는 백일장에는 도의상 참여하지 못하는 어설픈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백일장의 계절이 돌아오면 불치병이 도지듯 그 다크호스 선수처럼 인근 도시로 원정을 떠났다.  내 한계가 거기까지였는지 장원은커녕 꼴찌인 참방상 하나 달랑 들고 돌아오면서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하며 실망한 끝에 자의반 타의반 백일장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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