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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Jan 04. 2018

엄마의 하느님

엄마는 오랫동안 종교를 가진 적이 없었다.

종교를 일종의 사치 부림으로 여길 정도로 교회나 절에 다니는 사람들을 할 일 없는 사람으로 여겼던 엄마가 종교를 가지게 되자, 나는 그게 무엇이든 엄마의 노동 시간이 줄어들고 드디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구나 하고 내심 반가웠다. 엄마는 하루 24시간을 쪼개 항상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던 사람이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믿게 된 그 종교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아주 많이 요구하는 종교였다. 엄마처럼 시간을 황금같이 여기는 사람에게 그 종교로서는 엄청난 헌금을 받은 셈이 되려나.

엄마가 종교를 가지게 된 계기는 뇌출혈로 병석에 누워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었다. 이웃집 아줌마가 엄마를 전도했는데, 아마도 그 이웃집 아줌마가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교회로 갔을 것이고, 절에 다니는 사람이었으면  절에 가지 않았을까 싶다. 종교도 타이밍이 필요한가 보다.

엄마는 그동안 병환 중인 아버지를 제대로 보살피기는커녕 구박만 했는데, 이렇게 덜컥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고 자조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웃집 아줌마가 권하는 그 종교에서 기원하는 방식대주문을 외우면 아버지가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졌나 보다. 엄마가 모임에 따라갈 때만 해도 그저 엄마의 허해진 마음과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잠시나마 달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무슨 일이든 했다 하면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었으니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엄마를 이끌고 간 이웃 아줌마는 가족들의 반대로 탈퇴했는데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종교가 아닌,  사이비라느니 왜색 짙은  종교라느니  비난받기도 하는, 좀 이색적인 종교였지만 엄마가 마음 붙일 곳이 생겼기에 우리 모두 인정해 드리기로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치매에 걸려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도 엄마는 전처럼 새벽 기원을 빠지지 않고 올렸다. 그 종교에서의 의식대로 주문을 한참 동안 외우면서 말이다.

그러나 치매가 심해지면서 엄마의 종교생활도 잊혀갔다. 새벽 예불의식을 점점 빼먹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염주를 보고도 그게 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쳐다보실 정도가 되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엄마의 특이한 종교생활을 마뜩지 않아했었다. 좀 더 일반적인 종교로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고 절에 다니는 사람도 많은데 하필 요란한 주문을 외워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커다란 목소리로 독경을 외어야 소원의 효험이 있다니 말리지도 못했었는데 정작 이 모든 의식을 다 잊어버린 엄마가 안쓰러워졌다.


엄마가 독경을 생각해내 다시 외운 것은 병원에서였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고관절 수술 후  첫날밤에 섬망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엄마가 의식 없이 누워 있다가 갑자기 아주 명료한 목소리로 옛날처럼 독경을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다른 환자들이 모두 잠든 밤 11시쯤 6인실 병동에서 아주 낭랑한 기원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남묘호랭..."

소원의 효험을 보기 위해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더 크고 높아졌다.

엄마의 요란한 기원 소리는 같은 방 환자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복도로 나가 다른 입원실에까지 크게 울려 퍼졌다.

당혹해진 내가 엄마 입을 막아가면서 말렸지만 엄마의 가냘픈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내손을 뿌리치고 목소리를 점점 더 높였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였다.

옆 침상 가족의 경멸 어린 눈초리가 노골적으로 느껴져 왔다. 낮에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의 병문안을 받은, 그리고 잠들기 전에 조용히 기도를 드렸던 사람이다. 엄마의 요란한 기원 소리가 주기도문이나 성모송 같은 우아한 기도였더라도 주변의 시선이 이처럼 따가웠을까, 하다못해 비슷하게 불경을 읽기라도 했더라면 생각하니 엄마의 종교의식이 더 원망스러워졌다.

나는 종교에 대해 특별한 편견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편이다. 어느 종교든 그만의 사상으로 믿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종교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종교를 가지면서부터 마음이 여유로워졌고, 게다가 우리 가족이 경제적으로도 잘 살게 되었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계셨다. 그게 모두 다 엄마가 열심히 기원한 덕분이라고 늘 우리들에게 당신 종교의 타당성을 강조해 왔었다. 엄마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우리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엄마의 마지막 기원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섬망 증세였지만, 엄마의 하느님이 엄마의 간절한 기원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간호사실에 부탁해 엄마의 침상을 1인실로 옮겨갔다. 다른 환자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줄 수도 없고 엄마는 마음껏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수술 후 치매는 더 심해졌지만 한번 말문이 트인 엄마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원 소리를 높였다. 재활 요양병원으로 옮겨가신 후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요양보호사인 연변 아줌마가 '남묘호랭이 뭐래요? 할머니가 자꾸 그러던데.' 하면서 웃었다. 이상하게도 연변 아줌마의 그 웃음이 순수하게 느껴지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변의 눈치나 보던 내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재활이 끝난 엄마를 모실만한 요양원을 알아보러 여기저기 다녔는데,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사설 요양원들이 기독교 분위기를 내세웠다. 프로그램에 예배시간이 있는 등 어느 요양원에서는 엄마를 잘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할렐루야! 를 외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요양병원의 연변 아줌마가 더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엄마의 종교를 차마 밝히지 못해서였나 보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에 입소신청을 하러 가서야 종교 난에 엄마의 종교를 적어 넣었다. 입소 예정자의 종교는 상관없다는 수녀님 말씀에 용기를 얻어서였다. 무엇보다 엄마가 계속 외치게 될 기원 소리에 놀라지 말라는 언질을 남겨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엄마는 새로 생겨서 비교적 깨끗하고 믿을만한 요양원으로 모셨다. 이곳 또한 기독교를 표방한 시설이지만 엄마의 종교를 미리 알려 주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요양원 입소 이후로 엄마가 나름의 종교의식을 치른 적은 없었나 보다. 내가 자주 가는 편이어서 요양사들과도 친숙하게 지내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그런 적이 없단다.

아마도 엄마의 하느님은 조용히 엄마 마음속에 살아계시면서 그동안 엄마를 지켜주셨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하느님께 감사를...


 


PS : 참고로 나의 종교를 말하자면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교회에 다녔고, 어른이 되어서는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는데 지금은 냉담중이다. 가끔 시어머님이 가시는 절에 함께 가기도 한다.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엄마의 종교 회합에도 동원되어 몇 번 따라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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