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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Feb 02. 2018

행복했던 엄마를 기억하라

엄마가 떠나신 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울증이 왔다.

시끌벅적하던 가족이 각자 볼일로 나가고 없는 낮,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전에는 그토록 원하고 원했던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는데 말이다.

무심코 가스 불을 켜놓고 침대에 누워 있다 잠들어 집안을 너구리 소굴로 만들질 않나, 한밤중에 깨어나 그냥 눈물이 흐를 때도 있었다.

치매 엄마 수발드느라 긴장하며 살았던 몇 년 동안에는 오히려 없었던 증상들이다.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몇 개월이나 입원해 계실 때는 엄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식도 없이 연명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누워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엄마를 보면서 사람의 목숨이 정말 질긴가 보다 하는 못된 생각을 할 때였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로 인해 내 심신이 어지간히 지쳐있었나 보다.

오죽하면 엄마 장례식 때 어느 지인이 농담처럼 내 얼굴이 너무 좋아 보인다며 표정관리 좀 하라고 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엄마에게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났다. 그리고 그동안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어렸을 때 엄마가 나에게 잘해주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 우리 남매들 기죽지 말라고 늘 당당했던 엄마였다. 스케이트장에서 다른 아이들 타는 거 구경하고 있던 나와 내 동생에게 덥석 스케이트를 사준 적도 있었다. 물론 하나 가지고 번갈아 타라는 거였지만 1960년대에 스케이트는 한 반에 한두 명 가질까 말까 하는 사치품이었다.

없는 살림인 줄 뻔히 알았기에 좀 부담스러웠던 추억이다.  초등학교 때 내가 스케이트 선수였었다는 말만으로도 그 시절에? 돈 좀 있는 집이었나? 가 되니 엄마의 자식들 기살리기는 성공한 셈이다.


반대로 엄마의 행색은 늘 남루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엄마에게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고 추위를 막는 용도가 다였다.

여기까지의 엄마로만 기억된다면 나는 아주 더  많이 우울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엄마는 자식들 출가시키고는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

회갑 때 막내딸이 사다준 밍크코트는 추위를 피하기보다 자식들 잘 키워낸 상징으로 여겼을 정도로 옷차림이 명품 위주로  달라졌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가 본다면 돼지 발에 진주라느니  졸부 티가 난다느니  했겠지만 엄마는 이렇게 입어야 자식들 욕먹지 않는 거라고 당당했다.

만약 엄마가 몸에 밴 근검절약을 발휘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지지리 궁상으로 사셨다면 우리들 가슴에 한으로 남을 뻔했다.

그뿐 아니라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셨다.

언젠가 엄마가 자랑스레 했던 말이 지금의 내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 내가 소련하고 아프리카만 빼고 전 세계 여행 다 해본 셈이네.


사실 나는 그런 엄마가 무척 낯설었다. 그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 쪼들릴 때였는데, 엄마의 무조건적인 자식들 사랑에서 제외된 기분이라 많이 섭섭했었다.

그러나 만약 그때 엄마가 나를 지원하느라 해외여행을 포기했었다면 엄마의 여유롭고 행복한 노년생활에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그 회한으로 더 우울했을 테고.

내 관점에서 엄마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 시절이 가장 여유롭고 행복했으니 그때의 엄마만 추억하기로 했다. 엄마를 끝까지 집에서 모시지 못한 내 죄의식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안간힘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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