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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Feb 20. 2018

즐거운 할미 생활

우리나라에서 내 나이쯤 되는 여자들은 손자녀 돌봐주기에서 자유롭기가 힘들다.
손자 돌보기가 물론 가장 힘들지만, 뻔히 도움이 필요한 줄 알면서도 봐주지 못하는 할머니 마음도 편치는 않다고 한다. 자기 자식 자기가 키우는 게 당연한데도 말이다.
내 경우는 딸이 직장생활 그만두는 것이 아까워 자처해서 맡았기 때문에  힘들다는 말도 못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희생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알아줘봤자 고생이 덜해지는 것도 아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그러나 잠시라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손자를 돌볼 때는 우선 육아 장소를 어디로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선배 할머니들에게 물어보니 손녀를 집으로 데려오기보다 내가 그 집으로 가서 돌보라는 쪽이 압도적이다. 이유가 여러 가지였는데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 내 몸 하나 쏙 빠져나오기가 수월하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긴장되었다. 그렇게나 살벌한 전쟁터란 말이지.
아침마다 딸의 집으로 출근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어서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라고 요구했다. 몇 년 간만 봐주면 될 것 같아 전세를 알아보라고 했더니 딸과 사위는 아예 우리  아파트 단지에 집을 사서 리모델링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우고 이사 들어왔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들리고 말았겠다.
아기 보다가 허리가 나갔다느니 손자를 보는 1년 동안 5년은 팍삭 늙었다는 둥 무시무시한 괴담이 현실이 된 것이다. 정말 이대로 지내다간 동안童顔이 노안老顔되는 건 잠깐일 것 같았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일, 나는 단단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손녀를 잘 돌보기 위해서는 체력이 좋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해왔던 에어로빅 운동은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손녀보다 보면 지쳐서 집에 가서 쉬고 싶지만 운동시간을 저녁으로 옮겨가면서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켰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놓으니 딸과 사위는 내 운동시간에 맞추기 위해 저녁 회식 취소하고라도 달려와준다. 그게 조금 안쓰러워 내가 운동을 그만둘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체력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육아를 전담하다 보면 내 생활이 없어진다. 다행히 나는 혼자서도 잘 노는 스타일이라 무리가 없지만 친구 만나기 좋아하는 할머니들은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취미인 글쓰기도 아기가 잠자는 동안 옆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자제하기로 했다. 시력이 급격히 떨어진 후론 PC를 이용한다)
남편 또한 든든한 아군이다. 우리 아이들 키울 때는 그렇게도 미숙하더니 손녀와는 나보다도 더 잘 놀아준다. 손녀가 할미보다 '하비~'를 외칠 만도 하다.
이렇게 손녀와 잘 놀다가도 친구들이 해외여행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면 우울해진다. 어차피 자주 갔던 것도 아니면서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지난여름 북유럽으로 여행 가자는 동창 친구들 얘기를 들으니 더 가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내 표정이 하도 심란해 보였는지 딸이 희소식을 전해왔다.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에 사는 사부인이 와서 일주일 정도 손녀를 봐주겠다고 하셨단다. 그러니까 한 달에 한 번씩 나에게 휴가가 생긴 셈이다.
지난여름 북유럽 여행을 비롯해 최근 들어 해외여행이 잦아진 것도 그 황금 같은 일주일 덕분일 것이다.
어쩐지 눈치가 보였던 남편에게도 친구들과의 여행이 당당해졌다. 열심히 일한자가 떠나는 여행 아닌가 말이다.  
이제는 손녀를 보지 않았던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여행 계획을 짜는 할머니가 되었다.

필란드 헬싱키 공항의 무민샵에서

할미 생활을 하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있는 어린이집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규모가 작아 오히려 더 안정적이고 이웃집에 놀러 가는 느낌이다. 친구들 만나러 가는 손녀에게나 달콤한 휴식시간이 생긴 나에게나 어린이집은 정말 고마운 공간이다.
아직 두 돌이 되지 않은 손녀는 하루 서너 시간이지만 놀이터 등으로 콧바람 쐬고 오니 좋고 나는 그 시간으로 운동시간을 옮겼다. 덕분에 딸과 사위에게도 가끔 저녁시간을 허용해줘서 회식 같은 여유도 즐기는 것 같다.
불안해서 어떻게 그 어린것을 어린이집에 보내느냐고 하면서 하루 종일 아기랑 떡을 치는 할미를 보면 참 주변머리 없어 보일 정도로 안타깝다. 어린이집을 잘만 고르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뉴스에 올라올 정도의 불미스러운 어린이집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어린이집 예찬론자다.
정부에서 어린이집만 효율적으로 잘 지원해줘도 출산율이 쑥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육아 현장에서 느낀 할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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