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kg부터
나도 사실 사람용 허리띠라는 걸 차보고 싶었다.
목욕탕에서 눈치 안 보고 때 밀고 싶었다.
옷가게에서 사이즈로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전철 타면 두 칸 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은 가출한 명왕성 모습이고,
라섹 실패한 파리처럼 방향감각도 없었다.
결국 다이어트를 국가비상사태급으로 결심했다.
체계적으로, 방해 없이, 냉장고와의 국교 단절!
어떤 핑계도 스스로 합리화하지 않도록 계획했다.
먼저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3개월 뒤에 가게 나한테 넘겨줘. 당분간 나 찾지 마 ”
친구들과 여시 막내고모에게 전화했다.
“3개월만 나 찾지 마 ”
그리고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이경영 박사의 《세상이 즐거운 거꾸로 다이어트》.
집에 와서 정독. 재독, 활자를 거의 씹어먹었다.
바로 마른 김과 녹차가루를 샀다.
인간이 아니라 해조류 프로젝트였다.
하루 루틴은 이랬다.
새벽 5시 기상에 일어나 스트레칭
김 두 장과 물 들이부어 마시고 오이 2개를 먹었다.
점심엔 저지방 우유, 상추, 깻잎, 밥 반공기. 계란 한 개.
저녁은 삼각김밥 하나. 오후 6시 넘어서 위장은 파업!
레슨 한 바퀴 돌면 밤 10시였다.
본격적으로 테헤란로에서 방이역까지.
서울 한복판을 러닝머신으로 사용한 것이다.
비 오면 우산 쓰고, 바람 불면 얼굴로 맞고,
하루도 안 빼고 무조건 빨리 걸었다.
사람은 다 빠지고 단풍만 남아서
나 혼자 인도를 점령하고 있다.
손은 손날처럼 세워져 있고, 미간은 자동으로 잠겨 있고, 엉덩이는 왜인지 늘 뒤로 빠져 있다.
상체는 중력과 타협 실패로, 앞으로 쏠리고
다음 생(生) 먼저 가 있는 자세였다.
일주일은 금방 6kg 감량했지만, 티 안 나고..
'이 몸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그다음은 못 할 게 뭐냐.'
2주일째 3kg 감량했다. 정체구간 티 안 나고...
아직 상체는 지방 많은 방어회고,
발바닥은 개불이 됐다.
한 달 뒤 8킬로 감량했다
사람들은 살 빠졌다고 했고,
나는 유서 쓸 체력만 남았다고 느꼈다.
두 달째, 4kg 더 감량했고 바지가 흘러내렸다.
이건 살이 빠진 게 아니라
하체와 바지 사이의 물리법칙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나는 앞으로 걷는데 바지는 과거로 갔다.
두 달 2주째 5kg 감량했다.
영혼은 미스코리아 도착, 몸은 아직 로딩 중이었다.
3개월째 드디어 비만 봉인이 풀렸다.
최종 27kg. 몸이 빠진 게 아니라
사람 하나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대신 인상이 바뀌었다.
전에는 싸우진 않는데 안 비켜주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말 걸면 다 들어줄 얼굴.
보험 붙고,
설문조사 붙고,
“도를 아십니까” 붙고.
카리스마도 같이 빠졌다.
다이어트 기간 중에 레슨 끝나고
목이 말라서 슈퍼를 찾았다.
골목으로 들어가고, 정신 차려보니
논현동 주택가였다.
허름한 상가 건물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또 촉이 왔다. 아, 여기다.
좁은 계단을 걸어그냥 2층에 올라갔다.
실장이 물었다.
“어느 분 소개받고 오셨어요?”
“그냥 걷다가요.”
“네? 뭐 하시려고요?”
“쌍꺼풀이요.”
“결제는 카드세요? 현금이세요?”
“수표요.”
그랬더니 실장 얼굴에 물광이 더 빛났다.
갑자기 VIP 대접하듯
“이번에 국내에 새 기술이 들어왔고요.”
원장님이 해외에서 직접 배우셨고요.
붓기도 거의 없고요.
라인이 굉장히 자연스럽고요.”
그리고 실장은 마지막에 조용히 말했다.
“현금 150만 원입니다.”
난 물가도 모르고 내 얼굴이 세일인지 정가인지도 몰랐다.
“네. 진행해 주세요 빨리! ”
마침 다음 날 스케줄이 비었다고 했다.
“그럼 내일 수술할게요.”
난 대답도 안한채 수표 뒤에 이서를 갈기고 줬다.
칼 안 대는 매몰법이었다.
얼굴은 안 베고 통장은 베는 수술.
부기도 금방 빠지고 일상생활이 바로 가능하다고 했다.
다음 날 휘파람을 불면서 병원을 갔고 누웠다.
마취도 안 아팠고, 시술은 금방 끝났다.
머릿속은 이미 주말드라마 3회분을 찍고 있었다.
남자 의사 선생님은 잘됐다고 하시긴 하는데
거울을 봤는데 도무지 모르겠고,
그래도 150짜리 얼굴답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중은 빠졌고
얼굴은 환승 중이었다.
그리고 3일 뒤 부기는 다 빠졌다.
막 강력한 미인상은 아닌데
동네에서 튀기다 만 탕후루 느낌이었다.
목주름은 그대로 문신으로 남아서 늘 가리고 다녔다.
그래도 살찐 모습에 기가 죽었는데 탈출했다.
다음날 엄마 집을 찾아갔는데
“누... 누구세요?”
보이스피싱은 안 속는 분이 친딸은 못 알아봤다.
“엄마 나 루달이!!”
가방을 보고 나서야
“아이고야!! 루달이여??”
그날, 처음으로 엄마한테 신분증 제출할 뻔했다.
“야호.”
가족관계 갱신 성공!!
엄마는 집에 와서 말했다.
쌍꺼풀 비용 200은 혼수 자금 선지급이었다고.
그럼 50만 원 남았는데
나보고 중고거래로 시집가라는 건가?
그날 이후 나는
1999년, 동네 지인들 사이에서
‘신분 세탁 말고 껍데기 세탁 레전드’로 불리게 됐다.
까짓것, 한다면 한다!
인간은 원래…
급하면 진화한다.
1999년 26kg 빼고 용문산 앞에서 친구들과 찰칵!
겨울날 산에 갔는데 혼자 부츠 신고, 청치마 입고. 쯧...
다시 건강하자!!아자!!까짓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