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니 합숙

by 루달


2002년 월드컵 붐으로 나라가 들떠 있었고
나도 같이 들떴다. 방향만 몰랐다.




양서방의 전 여자친구 편지 사건은

무릎까지 꿇고 솔직히 자백했기에 믿기로 했다.

기준이 좀 낮아졌다.

가끔 의심이 역류할 때마다 참는 쪽이 아니라,

벼르는 쪽으로 되새김질하곤 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과거에 대해 할 말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 불쑥 뽀뽀를 당한 것부터

애매한 연애 전과도 있었니까.


그 이후 양서방은 부작용 하나가 생겼다.
무슨 말만 하면 '정말 맹세한다니까요!'

기본옵션이 됐다.

연애가 무르익을 때 교수님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를 부른 예민 씨와

전국 분교에서 작은 음악회를 여는 일이었다.

중주팀과 SBS 촬영팀, 3박 4일간 경상북도로 갔다.


​그 바쁜 일정 중에도 양서방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를 해줬고 자상함에 빠져들었다.

'보호받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지방에서 올라온 저녁, 양서방은 마중 나왔다.

뒷짐을 지고선, 보고 싶었다고 했다.

'아니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안아주던가 웬 뒷짐?'


그는 얇은 입술을 꽉 쪼았다.

눈 깜박임도 없이 내 동공을 뚫어지게 봤다.

눈빛이 다트를 던지듯 날아왔다.


나는 부담스러워 째려봤다.

그는 다리 한쪽을 천천히 접아가며 무릎을 꿇었다.

내 앞에서 벌써 두 번째였다. 무릎 꿇는 게 습관인가.

곧 뒷짐 진 손을 풀더니, 장미꽃 백송이를 내밀었다.

"루달 씨 우리 이제 결혼할래요?"

그게 청혼이었다.


문제는 너무 티가 났다.

아까부터 계속 타이밍 눈치를 보더니

'지금이야!'라는 표정으로 부스럭거렸다.


나는 재빨리 꽃다발 비닐을 슬쩍 뒤적거렸다.

혹시나 하고 반지를 찾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무심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네”

일생에 한 번뿐인 프로포즈를 받아버렸다.


헤어진 뒤 꽃다발을 들고 엄마 집으로 갔다.

엄마는 교회에서 다들 괜찮은 사람이라고 소문까지 듣고 내 손을 어루만지며 흥분했었다.

처음 봤다. 엄마가 환하게 웃는 게...

엄마 웃는 얼굴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곧 오빠와 남동생은 펄쩍 뛰며 방에서 나왔다.

엄마에게 이미 족보 교육을 받았을까?

조선 시대 양반 놀이라도 하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형님, 우리 매형 생깁니다.”

“아우님, 우리 매제 생깁니다.”

​그 호칭이 너무 정확해서, 둘이 멀쩡해진 줄만 알았다.
공양미 삼백 석에 넘겨버리는 분위기였다.


독신주의였던 내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하나였다.

내 인생의 전부는, 엄마였다.
엄마에게 효도하는 길이 결혼이라 믿었고,
순서에 따르기로 했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는데 결혼 비용이었다.
마침 큰 고모가 올림픽 때 모래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는데 혼수비 전부 책임지겠다고 했다.

엄마는 돈 걱정은 하지 말라하셨다.
결혼은 미사일보다 더 빠르게 흘러갔다.


며칠 뒤 상견례를 서초동 한정식집에서 했다.

우리 쪽은 큰 고모, 고모부, 엄마, 작은아버지.

좀 사람이 많나 고민했지만...


이건 뭐지? 저쪽은 열두 분이 앉아 계셨다.

시부모님, 이모 넷에 이모부 넷, 시누이와 남편.

이미 수로 밀렸다. 게임 끝이었다.

시아버지는 삼대독자였고 양서방은 장남.

일 년에 제사가 열 번일 줄은 몰랐다.


거기다가 부산에 사신다고 들었는데

오래전부터 제주도 사셔서 언어 소통에 버거웠다.


이모들은 양서방을 보며
“무사경 지꺼전?”
왜 실실 웃고 있냐는 얘기였다.


큰 고모와 사돈들의 대화에도 번역이 필요했다.

"빨리 결혼식 올리죠"

"게메 마씀, 혼저 안 허민 늦어부난 안 됩주.”

"그럼요. 빨리 안 하면 늦어져서 안 돼요. 뜻이에요"

양서방은 신나서 끼어들었다. 통역이었다.


나중에 양서방에게 들었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자마자 우리 집 사람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목이 짧고, 목주름 때문이었다.

결혼식 날짜도 정해졌고 예식은 두 번해야 했다.

서울 교회에서 한 번, 부산 뷔페에서 한 번.

제주도 친척분들이 서울까지 못 와서였다.

상견례는 마쳤고 큰 고모는 잽싸게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끝냈다.


집으로 가는 길 양서방과 중요한 얘기를 했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이라지만

감정과는 다른 종류의 문제였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신혼생활 시작해요?”
“문정동 방 두 개 아파트 월세요.

저 근데... 제 남동생도 같이 살아야 할 것 같아요.”

하나 늘었다.


울 엄마도 시동생 세명이랑 신혼부터 쭉 함께 살았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 걸까?

결국, 엄마 코스를 밟았다.

'엄마도 시동생들을 결국 시집장가까지 보냈는데

나도 할 수 있겠지...'


양서방은 우쭐거리더니


“저 루달 씨... 당분간만 이모 아들 두 명도
같이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둘이 또 늘었다.


남편.
동갑 시동생.
이모 아들 둘.
네 명이 아니었다.
나까지 다섯이었다.


신혼집을 물었는데
인원이 돌아왔다.

문을 닫았는데, 사람이 더 들어왔다.

나갈 수도 없는
단체 카톡방이었다.

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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