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전
눈에 콩깍지가 가장 두껍게 씌워 있던 때였다.
막내 고모는 IT 남자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우리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새언니, 언니! 있잖아.
루달이가 새벽에 IT 사업하는 남자를 집에 데리고 왔는데 딱 보기에도 너무 괜찮아. 바로 결혼시키자!”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벌써 손주 작명까지 할 기세였다.
IT남자와의 전화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식사는 뭐 드셨어요?”
“지금은 어디예요?”
“어머님은 저 뭐래요?”
내 삶에 큰 변화가 생긴 거였다.
하루의 일거수일투족이 공유되었다.
연애가 아니라, 고객센터 응대 같았다.
결국 그 남자는 내가 20년째 다니던 대치동 교회까지
GPS도 없던 시절에 집념 하나로 찍고 왔다.
예배가 끝나자 교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막내 고모가 먼저 나섰다.
“엄훠, 집사님들. 우리 양서방이에요.”
벌써 양서방? 소름이 돋았다.
난 아직 이름 석 자도 입에 안 달라붙었는데...
교인들은 나를 딸처럼 아끼는 마음을 담아,
양서방을 격하게 환대했다.
양서방이 나타난 첫날부터 지휘자 고모부는
“양서방, 목소리 톤이 테너 영역이야.
오늘부터 성가대 연습 당장 시작해.”
양서방은 특유의 넉살로 손을 머리에 척 올리며
“넵! 충성! 고모부님 감사합니다요. 다 할게요.”
계약서 없이 바로 근무 시작이었다.
곧 성가대 연습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멀리서 큰 쟁반에 커피잔을 받쳐 든 이들이 나타났다.
양서방과 사촌동생.
사촌동생은 오르간 연주를 맡고 있었는데
언제 친해졌는지 그와 함께 쟁반을 같이 들고 있었다.
이미 팀처럼 움직였다.
성가대원들 얼굴에 바로 화색이 돌았고,
점수는 그날로 다 따냈다.
그는 우리 가족만의 양서방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사위가 되어 있었다. 지분이 나뉜 느낌이었다.
그뿐인가 성가대에는 소프라노 솔리스트인 사촌 동생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집안 라인업이 과했다.
양서방은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지갑을 열어 용돈까지 쥐여주었다.
아직 계약 전인데, 인센티브가 선지급됐다.
철없는 음대 신입생 사촌 동생은 넙죽 돈을 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형부, 고마워요.”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호칭이,
이미 호적 정리까지 마친 기세였다.
연애가 아니라 흡사 거대한 조직이 가동되는 듯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랜드 피아노 위에서
한 마리 백조처럼 더 우아하게,
슬쩍 곁눈질로 양서방을 의식하면서 쳤다.
손은 쇼팽, 눈은 면접관이었다.
양서방은 넋 나간 사냥개처럼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케이, 어이 양 씨! 이제 넌 내 거다.’
아무렇지 않은 척 즐겼다.
난 소머즈급 청력으로 하모니를 가르고
그의 목소리를 골라냈다.
귀여운 삑사리가 내 귀엔 선명하게 박혔으니까.
전선 위에 앉아 번개 맞은
참새 한 마리가 내는 듯한 얇은 소리.
음정은 흔들렸고, 존재감은 튀었다.
성가대 연습이 끝난 뒤 내가 좋아하던
미사리 카페촌으로 향했다.
결혼 전 미사리 카페를 전부 섭렵해 주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이행하는 열 번째 순방이었다.
마른 날씨에 날벼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미사리에 도착해서 내리려는데, 느낌이 싸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내려서는 순간,
내가 앉아 있던 시트가 이미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마침 하얀 옷이었는데... 낭만은 거기서 끝났다.
양서방의 얼굴이 내 얼룩보다 붉어졌다.
그는 차에서 내리더니 트렁크를 열고 잠바를 꺼냈다.
“이거, 허리에 묶으세요.
다 건강해서 그런 거예요. 괜찮아요 ”
“저… 그냥 컨디션도 안 좋고,
지금 집에 빨리 가고 싶어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해요. 제가 금방 시트 닦았어요.”
말투만 보면 이미 남편이었다.
다시 집으로 가는 차 안, 오후 햇볕이 따가웠다.
날씨까지 눈치가 없었다.
콜린성 알레르기도 있어 그냥 다 짜증 났다.
“앞에 칸 열면 선글라스 있어요. 그거 끼세요.”
글러브 박스를 확 열어젖히자, 낯선 물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핑크빛 편지봉투!
“이건 뭐예요?”
대답도 듣기 전에 이미 손이 먼저 열었다.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고 읽어버렸다.
그런데 내용은 내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사랑 ○○씨.
오빠, 나 다행히 어제 생리했어.
괜히 임신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부산에는 언제 내려올 거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배신이었다.
이 남자 내 건데. 다른 여자? 임신?
이해보다 반응이 먼저였고 이성이 무너졌다.
손에 들고 있는 게 종이인지 폭탄인지 부르르 떨었다.
“헉 깊은 관계 여자가 있어요?”
그는 내 손 위의 편지를 낚아챘다.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아니, 이게 왜 있지… 루달 씨, 오해 말아요.”
“오해? 무슨 오해요?”
나는 이미 결론에 가 있었다.
그대로 얼어붙은 고드름이 되어 서늘한 냉기를 뿜어냈다.
“자 두 눈으로 똑바로 봐요. 뭐! 오빠? 임신? 생리요?”
말이 점점 빨라졌다.
외곽 순환 도로에서 달리는 차였는데도
차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몸을 밖으로 비틀었다.
사실 며칠 전,
이 남자와 이미 선을 넘은 관계였다.
29살 노처녀와 33살 노총각...
나에게 그건 결혼을 전제로 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리고 차에서 그냥 문을 확 열었다.
판단보다 몸이 먼저였다.
“안 돼요!!!”
양서방이 급하게 핸들을 꺾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나는 바로 내렸다. 문을 쾅! 닫고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내저었다.
그의 해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곧 뒤에서 장마 빗소리처럼 우두두둑 발자국 소리.
양서방이었다.
거칠게 무릎을 꿇은 그가 내 앞에서 울먹였다.
순서가 틀어졌다.
남자가 우는 걸 처음 봤다.
"루달 씨! 지금은 그 여자 절대 안 만나요.
솔직히... 서른 살 전에 사귀었는데 헤어졌어요.
그 편지 버린 줄 알았는데...
전 루달 씨밖에 없습니다. 맹세합니다. 제발요"
울먹이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그날 이후로 기준이 하나 생겼다.
실수는 넘기지만, 거짓말은 못 넘긴다.
그리고 나는, 사랑보다 의심을 먼저 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