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 영화관
"아~! 시커먼 시커먼 시커먼쓰~"
1987년, 쇼 비디오쟈키 프로그램에
이봉원과 장두석은 시컨 먼쓰 하며 개그를 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홀연 듯 한 남자가 스친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장구 치던 친구가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고.
잽싸게 갔더니 친구 아빠가 직접 요리를 하고 있었다.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메뉴,
불그스름한 닭똥집 볶음.
감자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고추장 양념은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깻잎향으로 닭똥집을 참견했다.
장구 아빠가 해주는 요리는
맛보기도 전에 먼저 리뷰를 쓰게 할 만큼,
믿음이 갔었다.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면서 얼른 먹어보라 했다.
“루달이 매운 거 잘 먹니?”
“넵 딱 제 식성입니다.”
“닭똥집은 먹어봤어?”
“허파볶음, 닭발도 접수했습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침샘은 이미 단체로 들고일어난 상태였다.
닭똥집을 한 입 넣자마자
지금까지 먹어온 볶음 요리들은
전부 기억에서 로그아웃됐다.
쫄깃은 이빨을 배신하지 않았고,
양념은 정신없이 들이받았고,
냄비 바닥에 붙은 마지막 감자까지
증거 인멸하듯 박박 긁어먹었다.
곧 장구는 자기 방에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책상 위에는 변진섭 LP가
조상님처럼 모셔져 있었다.
무심히 앉아 있었는데
장구는 날 부른 목적을 얘기했다.
며칠 전 남자 선배가 편지를 줬고,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영화 보자고 했다며.
같이 가자는 거였다.
나는 원래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이라,
생각해 보는 척하다가 결국 같이 가게 됐다.
단성사 극장 앞에 도착하니,
남자선배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우리 학교는 신설이라
3학년이 없어서 2학년이 최고 서열인데,
그중에서도 인기 투톱이 둘 다 나온 거였다.
첫눈 로션을 바른 듯, 하얀 얼굴의 선배!
농구골대에 늘 존재감이 폭발하는 190 장신 선배!
난 기가 죽어서 장구 친구
팔짱을 꽉 껴버렸다.
내 존재감을 가리려는 원시적 몸부림이었다.
그런다고 가려지지 않았고,
더 걸리적거리며 눈에 띄었다.
선배들이 표를 끊어주고 단성사에 들어갔다.
아무 결정권 없이 따라간 것이다.
상영작은 에어리언.
갑자기 우주 끝에서 튀어나온 생명체를
대형 스크린으로 실물 영접했다.
인기 스타 선배들이 옆에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제일 설렜던 건 집 TV가 아닌 극장 스크린이었다.
집이었으면
볼륨도 줄여가며 이불 뒤집어쓰고,
잠깐 화장실도 갔다 왔겠지만.
극장에서는
외계인이랑 끝까지 같이 앉아 있어야 했다.
콜라와 쥐포를 들고 넷이 앉아 영화를 봤다.
앞자리에는
머리를 쓸어 넘기는 장구와 잘생긴 선배,
뒷자리에는
나 그리고 까무잡잡 선배.
저들은 한 쌍의 타오르는 불나방,
우린 한 쌍의 밝은 불빛에 얼어붙은 날파리 모습.
이렇게 앉으니까 나도 남자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바로 옆에 남자가 있으니, 영화도 허투루 흘렸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즉석 떡볶이집으로 갔다.
그런데 키 큰 농구 선배가 자꾸 나한테만 질문을 했다.
영화 감평회도 아니고,
떡볶이 얘기도 아니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설문 조사였다
“이름이 뭐니?
장래희망은?”
이러다가 신체검사까지 넘어갈 판이었다.
당황한 나는 평소라면 절대 안 할 대답을 했다.
“판사요…”
그건 그냥 우리 아빠가 바라던 직업이었다.
선배는 리액션도 없이
떡볶이 국물에 묻힌 계란만 직접 채용하며 먹어댔다.
'뭐냐? 저 반응?'
에이리언이 왜 튀어나왔는지보다
지금 이 자리가 더 소름 끼쳤다.
떡볶이를 먹고 종로를 걷는데,
내 친구와 잘생긴 선배는 딱 붙어 걸으며
첫사랑 바이브 풀충전.
보고 있노라니 갈비뼈 근처 췌장까지 간지러웠다.
나는 뒤에서 출렁출렁 그림자처럼 따라갔다.
나는 슬그머니 다른 방향으로 거리를 두며 빠졌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자 배려였다.
그때 장대 선배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루달아 길 이쪽이야”
갑자기 내 뒷목에 붙은 옷깃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들어 올렸다.
마치 쓰레기통에서 휴지 다시 꺼낼 때,
아니 정확히, 채변봉투 꺼내듯 쓰는 그 손모양.
옷이 아니라 나를 그렇게 집어 옮기는 느낌.
내 존엄은 그 자리에서 하차했다.
아, 이게 그 유명한
첫 남자의 손맛이구나! 정확히 나쁜 남자 손맛.
드라마처럼 전혀 설레지도 않았다.
난 여자가 아니라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거였다.
기분이 확 상했다.
멀대 하나 때문에 하루가 끝에서 구겨졌고,
인권 체험 현장 실습한 거였다.
그렇게 투벅 투벅 집에 와서, 문득 생각했다.
' 내가 그렇게 더럽나?'
며칠 전 피아노 치다가 배꼽 냄새 맡고
기절할 뻔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맡아봤다.
으악! 할머니들이 찰지게 하는 욕이 나올뻔했다.
그 뒤론, 배꼽만큼은 정성 들여 씻게 되었다.
며칠 뒤,
교실에서 장구 친구가 달려와 얘기했다.
날 여자취급 안 하던 얼굴 까만 선배가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했다고.
사람마음이라는 게 나 좋다니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배꼽도 제대로 씻고 사니까 뭐.
딱히 좋진 않았는데,
은근히 나쁜 남자한테 끌리는 미묘함.
가끔 친구들이 남자 친구 있는 건 좀 부러웠기에
서슴없이 가르쳐주라 했다.
나도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집으로 휘파람을 날리며 돌아와서는,
내 방문을 쿡 잠그고 쾌재를 불렀다.
난 전화번호를 건넨 이후로
생전 안 하던 짓을 시작했다.
전화기만 보고 있었다.
동생한테 TV 보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정작 시선은 전화기뿐.
그리고 금요일 오후쯤.
드디어 엄마방에 전화벨이 울렸다.
불난 것처럼 달려가서 받았고,
내 목소리는 절대 평상시가 아니었다.
입을 최대한 작게 오므리고
마지막 잎새 주인공처럼 가늘게.
“요 보세요.”
“저… 루달이 있어요?”
“존데요. 뉴구셔요?”
절대음감귀로 바로 낚았다.
그 농구대 스타 오빠 목소리.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여시처럼.
“내일 오후에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볼래?”
기다렸다는 듯이.
“네, 선배님.”
전화 끊자마자
무작정 엄마 옷장을 털기 시작했다.
입어보고, 벗어보고,
거울 앞에서 고개 각도 조절하고,
눈에 쌍꺼풀 풀칠 연습도 했다.
눈도 따끔,
연애 기회도 따끔.
안약은 있는데 연애약은 없었고,
알콩 달콩을 띄우며 잠을 청했다.
첫 남자는 불편했다 2탄
곧 만나요.
(계속 불편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