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머 시커머 시커먼스
1987년,
'쇼 비디오쟈키' 이봉원과 장두석은 개그를 했었다.
그 장면을 볼 때 문득 첫 남자들이 스쳤다.
까만 밤을 뒤적거리며 일어났다.
엄마가 아끼는 미끌미끌한 스카프를 메고,
안 빗던 머리도 시집가듯 곱디곱게.
드디어
키 크고 까무잡잡한 선배를 만나러 나갔다.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앞.
상영작은 변강쇠.
'마님' 부르는 남자와 '옹녀'원미경이 크게 그려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동굴 속 곰 한 마리가 가청영역을 찢듯,
깜짝 놀라 뒤를 보니
근데…
까만 선배 말고도,
더 눈부신 남자가 서 있었다.
학교에서는 이미 잘생김으로 검증 끝난,
정보 없었던 신비 그 자체였다.
비밀번호 없는 와이파이 인물.
제비가 살아있는 박 씨 두 개를
탁.
내 앞에 갖다 놔준 듯했다.
지금 이 두 선배를
혼자 상대 중이었다.
체력은 중1, 상황은 삼국지였다.
극장 앞 줄은 인간 사육장이고
건너편 단성사, 대한극장도 난리.
암표는 우리 집 한 달 반찬 값을 훌쩍 넘겼다.
도시는 불타고
나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스릴러였다.
결국 우리 셋은 도넛 가게로 피난 갔다.
까만 오빠가 자기 같은 반 친구라고 소개했다.
내 얘기를 했더니,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는 거였다.
누가? 왜? 언제부터?
설명은 생략되고 도넛만 추가됐다.
당최 무슨 작당인지, 폭탄 떠넘기는 건지…
난 일단 판단을 유보했다.
그 옆의 눈부신 선배는 내 눈을 못 보고
도넛만 노려보더니 괜스레 부끄러운 척한다.
여기서 제일 침착한 건 도넛이었다
세상에나.
14년 살면서
나를 좋아해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이 있다니,
게다가 멀쩡하고 눈부시기까지 했다.
이건 애정운 상승이 아니라
시스템 오류, 업데이트가 잘못됐다.
그러다 눈부신 선배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린 채,
편지 한 장을 테이블 위로 출렁 턱!
독립투사도 이렇게까진 안 하겠다 싶은 각도였다.
편지는 있었고, 명분은 없었다.
잠시 후
까만 오빠는 볼일 있다며 먼저 나갔다.
전날 나랑 통화하며 내 맘을 뒤흔들어놓더니,
김칫국은
이미 끓어 있었고,
식힐 사람만 없었다.
미끼 던져두고 사라지는 그 뒷모습.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버리는 방식으로
쩔어 있었다.
결국 눈부신 선배와 둘만 남았는데,
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말도 안 하고, 도넛만 계속 먹고,
나랑은 눈도 안 마주쳤다.
마치
나를 보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오늘의 주제는 도넛이었나?'
하도 답답해서 내가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상한 것만 학습 효과가 빨랐던 난,
나쁜 남자한테 배운 그대로 물었다.
이름이 뭐냐.
장래희망이 뭐냐.
그러자, 아주 짧게.
“김 X홍… 대통령.”
내가 얼마 전 대답했던 판사보다 더 스케일이 컸다.
계속 눈부신 선배는 아무 말 없이
철학자처럼 멍 때리고 있었다.
도저히 미남이고 뭐고 짜증이 났었다.
마음은 뛰어야 하는데
이미 준비운동부터 꼬였다.
난 답답해서 나가자고 했고, 묵묵히 따라 나왔다.
영화값 2500원도 굳었으니
내가 먼저 계산을 해버렸다.
나와서도 대화도 없이 전철 창밖만 보고...
구의역 계단을 내려서 집으로 걸어갔다.
걷다가 궁궐 같은 집 앞에 멈추더니
"가자. 우리 집"
난 이쁘게 꾸민 옷이 아까워서 따라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큰 외국 개들이 있었고
현관까지 레드카펫 밟듯 길었다.
갑자기 내 인생이 B급 영화처럼 웅장해졌다.
마당에는 잉어 연못까지 있었다.
여긴 집이 아니라 관광 코스.
오늘 데이트가 아니라 견학 왔구나...
현관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연예인 뺨치는 선배 엄마가 나왔다.
아, 이 집은 유전자부터 다르구나.
얼굴에 후광이 빛났다.
“루달이니? 반갑다. 어서 들어와.”
나는 이미
이 집에 등록돼 있는 듯 이름도 알고 계셨다.
언제 입주 신청서를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곤 선배가
내 옷을 살포시 잡아당기며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근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비행기가… 와……
우리 오빠, 남동생한테도 없는 취미였다.
신비의 인물이라 그런 취미인가?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가 공중전 직전.
천장은 이미 국방부 관할 같았다.
대통령이 꿈이라 그런 건지
방은 활주로였다.
그러다 거실에서 선배 엄마가 부르셨다.
걸어가면 될 텐데
선배는 오른손을 흔들면서
총총총 뛰어갔다.
집인데 총총.
거실엔
고급 유리 탁자,
동화 속 엔틱 소파,
나는 최대한 얌전한 요조숙녀였다.
선배는 집이라 편한지
소파에서 다리를
앞뒤로 계속 휘젓는다.
엄마는 외국 과자랑 주스를 들고
우리 옆에 앉으셨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루달아,
우리 아들 피아노 바이엘 좀 가르쳐줄래?”
내 머릿속에서
천장에 달린 비행기들이
일제히 추락했다.
선배는 웃기만 하고
또 물장구 하듯 발을 휘저었다.
그리곤 선배는 내 눈을 피한채 말을 했다.
“ 할 수 있다. 피아노. 잘"
선배 엄마는 외국 과자를 씹으며,
우리 엄마를 안다면서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박집사님 딸 얘기 많이 들었어.”
거기다
이 집엔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
봉투 하나를 건네셨다.
" 아줌마 이게 뭐예요?"
얼른 열었더니, 10만 원 수표!
며느리도 아니고 여자 친구도 아니었다.
본 부인에게 봉투 받는 막장 드라마 주인공 같았다.
그때 선배가 갑자기 말했다.
“나. 쉬. 하겠습니다 ”
엄마는 눈도 안 떼고
“그뤠구뤠 얼른 가.”
선배는 총총 사라졌고
거실엔 나와 엄마만 남았다.
엄마가 바로 실무로 들어갔다.
" 저... 우리 O홍이 한글이 좀 서툴러.
네가 그림으로 체크해 가면서
숙제 내줄 때 가르쳐줘.”
나는 거절을 못 해서 수락했다.
그때 선배가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즐겁. 지금. 나는 ”
“네? 아… 네.”
문장이 아니라 단어 테스트였다.
아… 날 좋아하는 걸까? 엄마가 시킨 걸까?
집에 간다고 인사하자
선배는 또
총총총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척하더니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문은 닫혔지만, 사람은 닫히지 않았었다.
자기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펼쳐 보더니
나한테 흔들며 말했다.
“와. 또… 루달. 와 ”
난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투벅투벅.
엄마에게 A부터 Z까지
오늘 상황을 말씀드렸더니,
“너 네 시간도 부족한데 무슨 레슨이야!
그 봉투 다시 갖다 줘.”
“알겠어. 근데 수표야"
"그래? 일주일 한 번만 가고 돈 이리 줘 "
"하지 마라며?"
"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몰라! 십계명..."
"네"
엄마는 수표를 보면서, 나를 향해 웃으셨다.
이때부터 돈 생기면 엄마를 드렸다.
봉투를 드리고 방에 들어와
그제야 처음 빵집에서 선배가 준 편지를 꺼냈다.
“루달아 좋아. 안녕. 가자 우리 집. 오늘 ”
아… 일찍 꺼내볼걸.
그날 밤
여러 가지 생각이 엉켰다.
마취 없는 메스로 어딘가를 건드린 밤이었다.
나는 불편(不便)했었고,
내 첫 남자는 마음 건강이 불편했었다.
*한 달간 레슨 이야기는
마지막 회에 남겨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