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송이 장미를 종이에 곱게 싸서
오늘도 내일도 하루같이 기다리네
오오오 내 사랑 달빛 미소 출렁이며
행복의 창문을 열어라 "
1987년, 도시아이들 ‘달빛 창가에서’.
건반과 기타가 공기를 갈랐고,
그 리듬에 먼저 반응하던 우리들이 있었다.
우리 반 송어, 남학생반 옹헤야,
반주 그리고 독주곡 연주까지.
결국 세탕을 맡게 됐다.
Dㅡ3
그날 바로 피아노학원 가서 상황을 말씀드렸다.
쇼팽, 즉흥 환상곡을 치려고 한다니까
아이들 다 잔다며 경쾌한 걸 치라고 틀어 버렸다.
선생님은 프로처럼 악상, 템포 지키라며
네케 '코스코프의 우편마차’ 악보를 내 손에 꽂았다.
3일 안에 외워서 암보로 연주하라는 미션.
그 뒤로 우리 집은
그냥 우편마차 굴러가는 우체국이었다.
Dㅡ1 day
대회날에 우리 반 의상은 하얀 블라우스였는데
내 몸에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골목시장 급습해서 겨우 건진 건
빅사이즈 반짝이 블라우스 하나.
입자마자 거울 속에 선 나는
합창대회 주인공이 아니라
피겨스케이트 갈라쇼에 막 난입한
의문의 동양인 선수였다.
Dㅡ0
합창대회 장소는 어린이 회관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육영순여사의 초상화가 벽을 점령하고 있었고,
무대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미 팽팽했다.
먼저 우리 반 송어들이 등장했다.
마음의 산소로 각각의 꿈을 바다까지 확장시키며,
기묘하게도 평균율의 균형을 맞춰냈다.
제철 만난 생선처럼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아름드리 성공이었다.
다음 남자반 옹헤야.
전주가 공기와 맞닿는 순간,
호흡 하나 조심스레 띄우고
호흡 두울 서로가 서로를 받쳐줬다.
강당의 조명은 하모니에 화답하듯 번쩍였다.
장구 친구와 눈이 마주치자
둘은 바로 텐션을 풀어 올렸다.
농학 혁명 같던 그 장면.
농부들의 땀방울로 의기투합한 듯
완벽한 합주였다.
피날레 순서는 3일 만에 외운
'코스코프의 우편마차'
있는 힘은 전부 쏟아냈다.
슈베르트가 되었다가
마부가 되었다가
나는 그 둘을 번갈아 타는 바람이었다.
손가락은 날아다녔고,
애들은 처음엔 환호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지곤 했다.
압도당한 침묵이었다.
독주도, 대성공.
대회 끝나고 곧 시상식을 했다.
총 열두 반에서 송어 1등! 옹혜야 3등.
나는 반주상을 받았다.
버거운 세탕이었지만 묘한 희열을 느꼈다.
며칠 뒤,
음악선생님이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건네줬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부끄러워지듯,
그 비디오도 떨리는 손끝으로 재생을 눌렀다.
그리고 화면이 켜진 순간.
나는 심장이 아니라 자존심이 먼저 멎었다.
직감했다.
내 흑역사는 여기서부터,
정식으로 발간되기 시작이라는 걸.
페달을 밟을 때마다,
내 반짝이 블라우스는 위로 말려
독립선언하듯 올라갔고
등살·뱃살은
우편마차 박자에 맞춰 배달되고 있었다.
마차 바퀴에 끼여서 폭주하는 모습.
애들이 공연 중간에 조용해진 이유가 그거였다.
그날 밤,
얼굴은 홍시가 되어 식을 줄 모르고
이불킥도 안 통했고
학교마저 가기 싫어졌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벽과 장롱 사이 그 좁은 틈을 열고
구겨진 빤스 한 장을
국기게양식 하듯 조용히 밀어 넣었다.
'이쯤이면 수치심도 따라 들어가겠지…'
그런 기대였을까.
나는 냉큼
엉켜버린 틈을 닫았다.
그 후 느껴지는
뭔가 정착한 기괴한 안정 소리.
뭔가 내 굴욕이 좋아서 눌러앉는 소리.
그날 이후로
우리 집 벽 틈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수치함 보관함이 되었다.
문제는… 며칠 뒤
엄마는 고무장갑을 낀 채로
내 등을 후려치며
“아, 이제 하다 하다 벽 틈에다
빤스를 꼬라 박 니?
어디서 저런 애가 나왔을까”
귀신같이 찾아냈지만 글쎄...
침대 밑에도 팬티들은
더 구겨진 자세로 진화한 채
체념한 표정으로 숨 쉬고 있었다.
나중엔 내 팬티는 동이 나서
엄마 팬티를 몰래 훔쳐 입고,
또 등살 후려쳐서 맞고.
수치심은 없어지지 않고,
형태만 바꿔서 다시 튀어나올 뿐이었다.
구겨진 빤스의 연대기는
내 자존심 박물관에
첫 전시품으로 걸렸고,
빤스의 역습으로 장식되었다.
그 후 시집가기 전
비디오테이프, 사진들을 버린 후
다이어트 성공을 했고,
아이를 낳은 후
거짓말처럼
꼬라박는 습관은 고쳤었다.
수치심을 겪은 아이가
그 감정을 혼자 삼키지 않도록,
어른의 따뜻한 관심과 대화가 필요하다.